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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통해 본 한국인의 풍류

최승건(15) 작성일 04-11-18 18:00 9,382회 0건

본문

Ⅰ. 들어가면서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민족이 있고 그들이 즐기는 술 또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각종 유형의 술은 그 나라의 지리적 여건, 기후, 환경, 인습, 종교 등에 따라 나름대로 그 민족 고유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멕시코의 독한 술 ‘데킬라’는 선인장 용설란에서 얻은 술로 한잔 마시고 소금을 찍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에 가면 짚을 싼 꾸러미 오크통에 익은 '마티니'와 '배리므트'의 칵테일이 있으며, 스페인 남부 안다르샤의 '셰리'라는 술이 있는데 16세기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애주했던 단맛의 술이었다.

북대서양 연안의 오프르트 항구에 가면 포르투칼이 자랑하는 포도과즙 브랜디 와인 '포트'가 있고 더불어 마딜라 섬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와인 '마디라'와 '마티우스'도 있다. 네덜란드에는 '하이네캔' 맥주와 국민주로까지 내세우는 '드라이진'과 무색투명한 두송향의 '리큐르'와 '지나봐진'이 있다.

캐나다에는 초창기에는 신천지를 개발하면서 즐겨 마시던 '캐나디안 위스키'가 있고, 스코틀랜드에는 유명한 '스카치위스키'와 '드람뷰이', '리큐르' 등이 있다. 카리브해 연안 서인도제도에는 드라이하면서 맛과 향이 중후한 사탕수수로 빚은 해적의 술 '럼주'가 있다.

중국으로 오면 수수로 빚은 '고량주'와 '배갈'이 있고 미국 닉슨 대통령과 등소평이 브라보해서 유명해진 '마오타이주'가 있다. 아프리카 피그미 민족은 나라가 너무 더워서 술이 발효 후에 쉽게 부패하므로 보존이 불가능해서 술을 만들지 못한다.

북극의 에스키모 민족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토양의 생성상 곡물의 재배가 불가능하여 술을 제조하지 못하며 설령 곡물을 수입해 와도 너무 추운 탓에 술 제조가 안 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식생활 패턴이 그때그때 필요한 먹을 것을 수렵하며 취하는지라 식량 비축상의 문제로 술을 제조 못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술을 만들 만한 조건임에도 술을 제조할 줄을 모르거나 술을 마실 줄을 몰라 술이 없는 민족이다. 한편, 유럽권에는 spirit가 ‘술’과 ‘정신’을 뜻하고 있고, 동양권의 한자어에서는 정신(淨神)과 주정(酒精)의 ‘정 (精)’자 같은 글자임을 보아도 인간의 일상생활과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 이전부터 술을 빚어 신 인류가 술의 주요 성분인 알코올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수 천년의 지나고 나서다. 서기 8C경 ‘제버’라는 아랍인이 와인의 발효 중에 생기는 불순물을 없애기 위한 실험을 하다가 그 정수액을 분리시켜 낸 것이 인류 최초의 알코올 발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3C 프랑스 몽펠리 대학의 교수였던 빌뇌브가 실험 중에 재발견하여 만병통치의 ‘생명수(Aqua vitae)'라고 이름을 지은 후부터였다. 그 이후 지구상에서 술이라는 말이 없는 고장은 없다. 세상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것’과 ‘없이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 있다.

전자와 후자중에서 우리들에게 의외로 매력적인 것은 후자가 아닐까 한다. 술이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의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술은 우리들의 상상력이나 공상력을 풍부히 하여 주기도 하며, 때로는 혼란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정보 선행형의 상품이면서 또한 문화나 풍속에 민감한 물체인 것이다. 소비분야 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음료이지만, 사회상황이나 인간욕구의 다양화에 따라서 이 분야의 변천은 놀라우리 만치 눈부시다. ‘노래는 세상에 따라. 세상은 노래에 따라. 그런데 기쁨과 비애의 노래에는 반드시 이 술이 깃들어 있다.’

과거에는 제 코밑에 달린 입술만 제대로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마시든 상관이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그 이유는 술의 종류가 너무 많고 성질이 다양해졌다. 때와 장소 그리고 분위기에 어울리는 화제와 술병들을 찾아 놓을 줄 알아야만 비로소 풍류를 좀 아는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Ⅱ. 삶의 멋과 맛을 불어넣자. 
 
‘술도 음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술을 잘 마시면 음식이 되고 잘못 마시면 뜨물이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술을 잘 배워야 행세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잘못 배웠다간 톡톡히 패가 망신을 당하지 일쑤라는 격언도 될 수 있다. 또 술을 적당히 마시면 보신(補身)하며 장생(長生)도 할 수 있다.

더욱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첨예한 정신적 업무와 복잡한 생활 속에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어, 스트레스 해소의 일환으로 끼리끼리 만나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하며 마시어 왔다. 이렇듯 술은 생활 속에 함께 섞이어 낭만과 인생을 자연과 유착시켜 시와 문학으로까지 승화시킴으로써 예술적으로 풍미되었다.

지금도 농촌의 가풍을 지키는 집을 방문하면 으레 손님 대접은 가양주(家釀酒)를 내와 집안의 어르신과 정중히 마주 앉아 예의를 갖추어 대작한다. 그 옛날 ‘명정(酩酊) 40년’의 호기를 과시했던 당대의 주선(酒仙)들은 모두 갔지만 그처럼 멋있었던 시와 문학 속에 인생의 멋을 가르쳐 준 일화를 남겨준 선주(先酒)님에 비하면 요즘 우리들의 술과 관련된 문화는 한마디로 멋이 없는 듯하다.

먼저 술은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데, 요즘 사람들은 멋있는 철학과 인생관 그리고 정서적인 교양이 옛날만 못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술은 밉지 않는 객기를 부추겨서 시적(詩的)음악성과 예술성을 겁없이 발산시키는데, 요즘 사람들에게도 그런 리드미컬한 예술성이 바탕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건강한 술 문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삶이 제법 여유를 찾은 지금까지도 요원하다는 안타까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갖가지 술버릇(술 문화)을 만들어 내어 그 독한 술을 냉수 마시듯 마시면서 그것을 호방함 혹은 사내다운 멋으로 여기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폭탄주, 원폭주, 수소탄주 같은 희한한 술버릇들이 우리 사회 이외에 그 어디에 또 있는 가 말이다. ‘삶의 멋과 맛을 불어넣자’ 라는 주제의 숨겨진 이유는 바로 이러한 양태를 벗어나기 위함이요, 곧 문화의 질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Ⅲ. 술-신(神)과 가까운 음식 
 
우리는 물이 잘 흐르는 모습을 ‘술술’ 흐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술은 ‘술술’ 잘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물(水)’과 ‘알코올(火)’ 사이에는 서로 상극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음양오행으로는 ‘수극화(水克火)’라 하여 ‘물이 불을 제압한다’고 한다.

물은 정적이므로 고여 있고 단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언제나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불은 동적으로 위로 올라가며 타고 발산되는 것이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기운과 위로 올라가는 기운 등이 함유된 것이 술이다.

알코올은 곧바로 휘발(揮發)되는 기(氣)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 몸에 들어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한다. 이러한 극적인 성질이 합쳐져서 술이 되는 것이다. ‘수(水)’라는 것은 정적이고 ‘술’이라는 것은 동적이다. 그래서 ‘정적인 물’에 ‘동적인 것’을 더하면 ‘술’이 되는 것이다.

예부터 술은 모든 제사 양식과 의식에 오르는 것이다. 지상에서 나는 가장 고양된 음식을 술이라고 하고 신에게 바치는 가장 신과 가까운 음식을 술이라고 한다. 술을 마시면 신바람이 생긴다. 신바람을 따라서 신이 내려온다. 그래서 종교양식과 제사양식은 신에게 술을 바치는 인간의 의식이다.

한의서에 술의 성질에 대해 논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술은 혈맥을 잘 통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 또, 우리가 자주 마시는 소주는 원나라 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대열대독(大熱大纛)한 것이라서 충(蟲)을 죽이고 장역을 물리치고 눈이 붉게 충혈된 적종(赤腫) 씻는 약으로 쓴다고 하였다.

‘흥부전’에 나오는 술 찌꺼기(술지게미)는 풀독이나 채독을 없애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타박상을 입었을 때 민간요법으로 술지게미를 다친 환부에 붙이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술이 한약재에 쓰일 때는 활동력을 강하게 하고, 위로 상승하게 할 필요가 있을 때 술을 적셔서 약재로 쓰기도 하고, 술로 초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술의 활동력과 열을 이용한 본초의 응용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술은 잘 쓰면 약이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대표적인 약이다.’
 
 
 
 
Ⅳ. 음주의 예절과 풍속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술 문화가 대단히 고상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속을 지니고 있다. 술을 음식 가운데 가장 고귀한 음식물로 인정한 우리 민족은 술 자체를 숭상할 뿐만 아니라 술에 따른 그릇까지도 중시하여 예절을 소학(小學)에서 가르침으로써 누구나 술을 마시는 범절을 깍듯했으며, 술을 먹는 모임은 모름지기 노래와 춤 및 시조를 곁들임으로써 운치를 돋우어 우아하고 고결한 풍류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우리 술의 유래는 고대 제천의식의 군무(群舞)놀이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옛날로부터 술을 하늘에 바치고 기분을 돋우는 음식으로 활용하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 이미 술에 대한 금법(禁法)이 발표된 것을 볼 수 있다.

신라 벌휴왕 3년에는 시장거리에서 술 주정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고구려 안원왕 2년에는 흉년이면 사원에서 양조하는 것까지도 금지하였으며, 고려에서는 지방고을에 명령하여 배불리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금지시켰고 조선 태종 원년에는 왕 스스로 금주하여 백성들의 비밀 음주를 금지시켜 왔었다.

술은 마시는 사람에게 두 가지 작용을 하게 된다. 적당히 먹으면 기분을 돋우어 힘을 내게 하지만 지나치게 먹으면 이성을 마비시켜 자제력을 잃게 한다. 따라서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상대의 주량에 한계가 있음을 먼저 명심하여야 한다. 옛 사람은 일찍이 하늘 땅 조상의 신령에게 제사할 때에는 술을 바쳤지만 도깨비나 마귀에게는 준 일이 없으며 20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한 성인에게는 술을 권하였지만 미성년자에게는 절대로 술을 먹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나 체력이 강건한 사람만이 술을 먹을 자격이 있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체력이 나약한 미성년과 정신박약자에게 술을 주는 것은 아주 부도덕한 행위로 규정하여 사회적 규탄을 받아야했다.

이러한 음주 전통에 곧 술을 대단히 고귀한 음식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남으로부터 술을 대접받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숙한 인격자임을 뜻하게 되어 마침내 한 몸의 영광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음주 예절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향음주례(鄕飮酒禮)요, 다음이 군음(群飮)이다.

향음주례는 세종대왕이 주(周)나라 예법을 바탕으로 그 절도를 가다듬어 각 향교나 서원에서 원생들에게 교과 과목으로 가르치게 했던 육례(六禮: 관(冠)·혼(婚)·상(喪)·제(祭)·상견(相見)·향음주(鄕飮酒) 가운데 하나로서, 어른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예의절차를 밝히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군음은 오직 떼지어 모여서 부지런히 마시고 노래하고 즐기기 위한 술 마심이다. 따라서 군음에는 일정한 형식도 절차도 없이 자유롭게 거리낌없이 즐기는 것이다. 애당초 그 예절을 논할 것이 없는 것이다.

경주의 포석정이나 부여의 낙화암 같은 곳이 군음의 유적지라고 할 것이다. 향음주례의 일관된 정신은 첫째, 의복은 단정하게 입고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 것. 둘째, 음식을 정결하게 요리하고 그릇을 깨끗이 할 것. 셋째, 행동이 분명하여 활발하게 걷고 의젓하게 서로 분명하게 말하고 조용히 침묵하는 절도가 있을 것.

넷째, 존경하거나 사양하거나 감사할 때마다 즉시 행동으로 표현하여 절을 하거나 말을 할 것 등이다. 술을 마심은 벌써 사교의 자리다. 의사를 표시함이 없이 술만 마시는 것은 상대를 불안하고 답답하게 하여 술맛을 떨어지게 하는 비사교적인 행동이다.

또한 술 앞에 자신을 지킬 능력도 없고 술을 이겨 낼 체력도 없으며 또한 술자리에서 정분을 나눌 줄 모르면서 오로지 술로 자기의 근심이나 잊으려 하거나 술기운으로 문제를 결단내려 하는 사람은 참으로 술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할 것이다.

향음주례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우리의 음주예절을 정리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술과 음식을 너무 질펀하게 하지 아니하며, 안주는 자기의 접시에다 덜어다가 먹을 것이며, 술잔은 돌리되 반드시 깨끗한 물에 잔을 씻어서 술을 채워다가 권하여 존경심과 친밀감이 전달되도록 한다.

술좌석에서 잔이 한 바퀴 도는 것을 한 순배라고 하는데 술이란 대개 석 잔은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 좋고, 일곱 잔은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므로 일곱 잔 이상을 절대로 권하여 돌리지 아니하였다.

예절이란 가면 오고 또한 주면 받는 것이므로 술을 대접받았을 때 뒤에 다시 갚아야 하지만 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어 그 두터운 뜻을 길이 간직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사람은 가끔 즉시에 즉흥적으로 갚아 버리기 위하여 2차니, 3차니 하면서 몰려다니지만 오히려 경박한 세태의 풍조라고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술좌석을 반드시 공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나 제자들을 동행하여 술시중을 들게 함과 동시에 술먹는 법도를 익히게 하였으니 술자리를 고상하게 승화시켜 일컬은 바 풍류(風流)라고 하였다.

풍류란 덕풍의 유행이니 모든 사람이 그 덕성스러운 행실에 감동하여 본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밤늦도록 술을 권하던 세종대왕은 학사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자 오히려 자기의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술 인심은 좋았던 것이다. 또한 술자리에 아는 사람이 오면 반드시 한잔 술을 권하였고 술을 혼자 마시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끝으로 술에 임하는 가장 높은 경지는 술자리에서의 즐거움도 섭섭함도 영예도 실수도 모두 한번의 웃음 속으로 흘려보내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가슴속에 미련을 남겨 두지 아니할 줄 알았던 한겨레의 독특한 음주문화는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에게 귀중한 것은 오직 예법을 지키는 것이나, 예법은 절을 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절을 함으로써 끝난다.

가는 데마다 절하고, 일할 때마다 절하고, 줄 때마다 절하고, 받을 때마다 절하며, 끝날 때마다 절하는 것이니 이것은 지극히 존경과 감사함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예법이 무너지는 것은 절하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동방예의의 고장을 다시 이룩함에 있어서 가정에서부턴 음주의 전통예법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Ⅴ. 절기 따라 익는 술 
 
우리 민족은 농경민족이다. 춘하추동의 각 절기에 맞게 농사를 지으며 농주와 놀이용, 제수용, 손님 접대용으로 술을 빚어 마셨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절기에 따라 가족간 이웃간 흥겹게 온정을 나누며 화합하고, 미래의 길흉을 점치고 액막이로 삼으려 했던 몇 가지 절기 술을 가지고 있다.

설날에는 세주(歲酒)술을 마셨다. 이때 술은 주로 맑은 약주와 청주를 집에서 빚어 마셨는데 마을별로 김씨네 술, 최진사네 술 등 집집마다 특색 있는 술을 빚어놓고 설로 나누어 마시는 것이 새해 초의 미풍이었다.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오곡밥을 먹기 전에 귀밝이술을 한잔씩 마셨다.

이 술을 마시면 한해 동안 귀가 밝아지고 정신도 맑게 해서 이명주라고도 한다. 어린이들에게는 귀밝이술의 잔을 입에다만 대개 한 뒤 그 술을 굴뚝에 붓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부스럼이 생기지 말고 연기와 같이 날아가 버리라는 뜻이다.

삼월 삼짓날에는 봄 놀이 술이라 해서 들녘으로 나가 봄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을 시냇물에 깨끗이 씻으며 이날 서울 근교에서는 사마주를 즐겼다. 3월의 청명일에는 청명주란 술을 즐겼다. 청명주는 한식 제수용으로 많이 쓰였다.

이맘때면 살구꽃이 피는데 흐드러질 때 담가야 맛이 난다고 한다. 이 술은 충북 충주 지방에서 많이 빚었는데 청주에서 청명주 한잔하고 가노라면 문경새재 마루턱에 가서야 술이 깬다고 했다. 농사일에 한참 바쁜 오월경에 마시는 술은 만두레, 공동 작업인 품앗이 중에 일하는 밭주인이 내는 품앗이 술이 있다.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에서 많이 성행했는데 농촌에서는 이른바 농주로 자리 매김을 한 술이다. 우리 나라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단오 날에는 창포술을 즐겼고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다. 피서겸 물가에서 하루를 즐긴다는 풍속이다.

신라 때의 기록은 이날 오미자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음력 7월 15일은 백중(백종)인데 농사가 끝났으므로 쉬게 한다해서 머슴의 날이라고도 불렀다. 이날 소먹이 놀이를 하면서 ‘입쌀 뜬 물’ 이라는 별칭의 농주를 즐겼다.

추석 한가위는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으로 성묘를 지내고 또한 햇곡식으로 빚은 술이라 해서 신곡주를 마시며 놀이를 즐겼다. 이때는 밥알이 둥둥 뜬 동동주를 많이 빚어 마셨다. 음력 9월 9일은 중앙절, 이때는 국화가 만발하는 때 이어서 국화전에 국화주를 마시며 시를 읊조리며 들놀이를 한껏 즐겼다.
 
 
 
 
Ⅵ. 나오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마신다. 알코올 중독자 문제로 큰 골치를 앓는 룩셈부르크나 프랑스 등 세계 최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미국이나 일본사람들의 음주량 수준까지 거의 육박하고 있다.

술 소비량이 생활 수준에 비례한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엉뚱하게 ‘술 마시기’만 제일 먼저 선진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 옛 선비들은 손님과 술을 마실 때 무려 13번의 예의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건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조를 한 수 읊조렸고, 술을 한잔 권할 때마다 주인과 손님은 여러 차례 절을 해야 했다. 지금도 성균관에서는 매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여는데 유교사회에서의 음주 형태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옛 주도문화(酒道文化)도 오늘날에는 찾아보기가 힘들어 졌다.

물론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신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단순한 동물적 생명력을 지속시키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의 내용, 삶의 색깔을 중시하는 것처럼, 술을 마신다는 것도 단순히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서양이나 동양이나, 술이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경우는 점차로 퇴색하고, 생활의 일부로써 즐기는 기호품이 되어 간다고 한다면, 술을 마시는 과정은 생활의 멋과 깊은 관계가 있고, 곧이어 술을 마시는 행위가 곧 삶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인생철학의 표현이 된다고 하겠다.

‘멋’은 영어로 Elegance인데 아치(雅致)와 달리 단순한 풍치가 아니라 고아한 품격을 갖춘 기상(氣象)이 겸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서양사람들은 동양에 비해 술을 마시는 멋은 별로 없다.

기껏 ‘건배’를 하고 무희(舞姬)나 가희(歌姬)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향을 돋구는데 그치는가 하면, 서로 어울려 춤추고, 주정부리고, 격투하고, 고성방가하기가 일쑤다. 물론 서양사람들도 고급 사교계에서는 술 한잔 마시며 고담준론이나, 정담을 나누는 수가 있으나, 우리 동양에서처럼 스스로 취향에 젖어 시를 노래하고 철학과 인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빗대어 말하건대 한국의 술은 손바닥과 목구멍으로 마시지만 서양의 술은 혀끝과 코, 눈으로 마신다고 한다. 다시 파자(破字)하면 우리나라 술은 시원스레 한 탁배기 마시는 음주 문화요, 서양의 술은 육감(六感)으로 음미하며 천천히 즐기는 음주 문화이다.

어느 서양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국의 생활 철학은 호방한 호랑이성 이고 서양의 생활 철학은 요리조리 대어보는 여우성 문화이다.” 예리하고 익살스럽게 지적하고 있음을 짚고 넘어 갔으면 한다.

****원융희(용인대 교수)****

벗들아, 수주 변영로 선생(우리 교과서에 실린 "논개"를 쓴 시인임)의 "명정 40년" 이란 문집을 추천해본다. 술에 관심 있는 벗들은 반드시 독파해야할 필독서가 아닌가 한다.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주선의 생생한 에피소드를 접하면 진정한 주도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범우사 아니면 삼중당 문고판(여하튼 두꺼운 책은 아님)이라 요즘은 한 삼 사천원 주면 살 수 있을 거라.벗들아, 과음하지 말고 항상 건강들 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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