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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최승건(15) 작성일 04-12-09 10:15 10,102회 0건

본문

라면을 먹는 아침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을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뻘에 말뚝 박는 법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호롱 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가지를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시인 함민복(41)은 이곳 버려진 농가를 개조한 집에 살고 있다. 녹슬고 빛바랜 대문을 여니, 부엌과 세면장을 함께 하는 듯 보이는 수돗가 큰 고무대야에 망둥이가 잔뜩 담겨 있다. 술안주로 얼려 놓았다가 녹이는 중이라 한다.

책상 하나가 유일한 ‘서재’는 온갖 책들이 책꽂이도 없이 벽을 의지한 채 쌓여 있다. 1인용 침대 하나가 달랑 있는 ‘침실’에 들어서니 며칠 내린 비 때문에 방에 물이 샌다며 연방 걸레질을 해댔다. 


그의 집은 재활용품 시장 같다.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버린 물건들을 하나 둘씩 받아 온 것이라 한다.

함민복은 가난하다. 아니, 가난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단지 무료라는 이유로 공고(工高)에 들어갔고 졸업 후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했지만 기계와의 대면이 너무 힘들어 4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는 시집 ‘우울氏의 一日’과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삶의 갈피마다에 스민 가난과 슬픔의 기억들로 서울의 천박성과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따뜻함과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는 고단한 삶의 체험을 관대한 즐거움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시는 그대로 그의 삶이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방을 전전하며 떠돌다 96년, 우연히 놀러 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짜리 폐가를 빌려 둥지를 틀었다는 그는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며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렸다.

그는 없는 게 많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편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난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구부정한 어깨를 가진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다는 게 결국은 부족하다는 거고, 부족하다는 건 뭔가 원한다는 건데, 난 사실 원하는 게 별로 없어요. 혼자 사니까 별 필요한 것도 없고. 이 집도 언제 비워줘야 할지 모르지만 빈집이 수두룩한데 뭐. 자본주의적 삶이란 돈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굳이, 확장 안 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

그는 오후 9시면 자고 다음날 오전 2∼3시경에 일어난다. 보통 9시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잠을 청한다. 빨간 양철 지붕을 가진 안채는 쯔진청(紫禁城), 파란 양철 지붕 행랑채는 청와대, 흰 슬레이트를 얹은 화장실은 백악관이라며 자랑했다. 그의 농담은 가난과 삶을 깔보고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관조’로 느껴져 따뜻했다.

새벽에 깨어 책도 뒤적이다 멍하니 날 밝는 것을 보기도 하다 일찍, 아침밥을 해 먹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일주일에 이틀 인근 도시로 시작(詩作) 강의를 하러 나가는 것 말고는 낚시하고 마을 가고 시 쓰고 손님들 맞고 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다.

그는 이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는 빈자(貧者)였다. 이 세상 모두가, 중심을 향해 그저 앞으로만 나가고 있는 이때, 변두리 바닷가로 스스로를 자꾸 밀어내듯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심(中心)을 부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선한 마음을 가진 함민복 특유의 낙관이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미안하다고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인 줄 뻔히 알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삶의 그물망을 넓혀 나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성자(聖者)라고 말했다.

소설가 김훈은 그를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표현대로 함민복은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은자(隱者)이고 숨어서 내다보는 견자(見者)였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에는,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이 시대의 빈자, 함민복이 산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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