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최승건(15)
작성일
05-01-18 13:27 9,317회
2건
본문
70년대 말의 얘기입니다. 갓 부임한 어느 유럽 국가의 대사가 우리 외무장관에게 이러
더랍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country of morning calm)’인 줄 알고 왔더니,
‘아침마다 놀라게 하는 나라(country of morning surprise)’라고요.
하긴 그 시절은 그럴 만도 한 시대였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여전히 그들을 놀라게 하는 나라입니다.
제 나라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놓고, 온 나라가 쫙 갈려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82년 무렵입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 입방아에 올랐더랬습니다. “나는 두
대양(대서양과 태평양) 가운데 위치한 이 선택받은 나라(미국)가,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
이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도록 한, 신(神)의 계획임을 믿어왔습니다.”
허풍이 좀 심하다는 거지요. 아닌 게 아니라 제 나라 역사를 자랑하는 대목에선, 역대
미국 대통령이 비슷합니다.
우리는 딴판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버텨낸 60년을 대견해하는 소리는 들
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의(不義)가 승리하고 기회주의가 득세(得勢)했던’ 부끄러운
역사라는,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국민소득 50달러 언저리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부터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치달려 온 대한민국의 역사가, 제 나라에선 이렇게 고단한 처지입니다. 발전론의 교과
서마다 대표적 성공 사례로 한국을 올려놓았던 서양사람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끄러운 역사인지, 자랑스러운 역사인지를, 이제는 따져보고
짚어봐야 합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발전의 역사인지 퇴보의 역사
인지 하는 데로 모아집니다. 결국 발전의 정의(定義)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일단 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의 정의를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벵골 출신의 인도 경제학자는 GNP나 GDP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오히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 불리는 그는, 경제문제에 윤리적·
도덕적 관점을 끌어들인 학자입니다.
센은 “사람이 사람다운 가치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실질적 자유를 넓히는 것이
발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GNP나 GDP 증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의 확대, 억압적
정치체제의 제거, 언론 자유의 신장, 국민 보건 증대와 문맹(文盲) 해소, 실업(失業)의
감소, 굶주림에서의 탈피, 여성 인권의 확장, 유아(幼兒) 사망 방지 등을 가져오는 것
이 바로 발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45년 해방 이후, 48년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걸어온 산업화·민주화의 길이
발전에 관한 진보적이고 포괄적인 이 정의와 들어맞습니까, 아니면 어긋나는 것입니까.
북한의 역사는 또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의 역사에 침을 뱉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답
해야 합니다.
센은 실업을 단순히 소득이 없는 걸로 보는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자신감을 잃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다 외로움 속에
죽어가게 하는 실질적 자유의 후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실업의 증가를 사회적 퇴보의
지표로 꼽고 있습니다.
이런 센의 눈에, 진보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청년 백수와 중년 백수를 양산해낸 이 정권
의 2년이 어떻게 비춰지겠습니까.
센은 수십만명이 굶어죽는 북한 사정을, 경제의 실패만이 아니라 자유의 부족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정치체제를 선택할 수 있고, 자유 언론이
정권을 비판할 수 있고, 그래서 통치자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굶어죽는 국민을 곁에 두고 원자폭탄 제조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쌀만이 아니라, 자유까지 함께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가 승리했던 역사일까요. 남과 북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올해 우리는 이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혼돈을 벗어나는 첫걸음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강천석-논설주간
2005.01.07
더랍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country of morning calm)’인 줄 알고 왔더니,
‘아침마다 놀라게 하는 나라(country of morning surprise)’라고요.
하긴 그 시절은 그럴 만도 한 시대였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여전히 그들을 놀라게 하는 나라입니다.
제 나라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놓고, 온 나라가 쫙 갈려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82년 무렵입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 입방아에 올랐더랬습니다. “나는 두
대양(대서양과 태평양) 가운데 위치한 이 선택받은 나라(미국)가,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
이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도록 한, 신(神)의 계획임을 믿어왔습니다.”
허풍이 좀 심하다는 거지요. 아닌 게 아니라 제 나라 역사를 자랑하는 대목에선, 역대
미국 대통령이 비슷합니다.
우리는 딴판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버텨낸 60년을 대견해하는 소리는 들
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의(不義)가 승리하고 기회주의가 득세(得勢)했던’ 부끄러운
역사라는,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국민소득 50달러 언저리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부터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치달려 온 대한민국의 역사가, 제 나라에선 이렇게 고단한 처지입니다. 발전론의 교과
서마다 대표적 성공 사례로 한국을 올려놓았던 서양사람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끄러운 역사인지, 자랑스러운 역사인지를, 이제는 따져보고
짚어봐야 합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발전의 역사인지 퇴보의 역사
인지 하는 데로 모아집니다. 결국 발전의 정의(定義)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일단 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의 정의를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벵골 출신의 인도 경제학자는 GNP나 GDP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오히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 불리는 그는, 경제문제에 윤리적·
도덕적 관점을 끌어들인 학자입니다.
센은 “사람이 사람다운 가치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실질적 자유를 넓히는 것이
발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GNP나 GDP 증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의 확대, 억압적
정치체제의 제거, 언론 자유의 신장, 국민 보건 증대와 문맹(文盲) 해소, 실업(失業)의
감소, 굶주림에서의 탈피, 여성 인권의 확장, 유아(幼兒) 사망 방지 등을 가져오는 것
이 바로 발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45년 해방 이후, 48년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걸어온 산업화·민주화의 길이
발전에 관한 진보적이고 포괄적인 이 정의와 들어맞습니까, 아니면 어긋나는 것입니까.
북한의 역사는 또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의 역사에 침을 뱉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답
해야 합니다.
센은 실업을 단순히 소득이 없는 걸로 보는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자신감을 잃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다 외로움 속에
죽어가게 하는 실질적 자유의 후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실업의 증가를 사회적 퇴보의
지표로 꼽고 있습니다.
이런 센의 눈에, 진보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청년 백수와 중년 백수를 양산해낸 이 정권
의 2년이 어떻게 비춰지겠습니까.
센은 수십만명이 굶어죽는 북한 사정을, 경제의 실패만이 아니라 자유의 부족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정치체제를 선택할 수 있고, 자유 언론이
정권을 비판할 수 있고, 그래서 통치자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굶어죽는 국민을 곁에 두고 원자폭탄 제조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쌀만이 아니라, 자유까지 함께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가 승리했던 역사일까요. 남과 북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올해 우리는 이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혼돈을 벗어나는 첫걸음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강천석-논설주간
2005.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