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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6구간(건천)

전태우(09) 작성일 05-03-28 09:35 9,485회 5건

본문

낙동정맥 6구간(건천)

단석산, 부산성, 사룡산, 아화4번국도 구간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ok그린목장 - 경주시 서면 아화리 4번국도)


단석산은 북으로 주사산(오봉산)과 건천벌, 동으로 금척고분군과 방내벌, 서로 산내면으로 둘러쌓인 경주주변에서 가장 높은 성산이다. 단석산은 신라화랑들의 수련도장이다. 김유신은 “단석산 신령님께 삼국통일의 원대한 소원을 빌어 바위도 잘라내는 신검과 지혜를 받았다.”라는 올해역사 74년인 건천초등학교와 무산학교 교가로 불려지고 있다.

건천읍은 넓은 옥토를 가졌으며 신라육부 촌중 무산 대수촌의 중심 거주지이며 손씨의 발생지이다. 신라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수도방위 사령부격인 부대가 작원성이라는 토성에 주둔하였다. 오늘날에도 그 마을 이름이 건천읍 작원이다. 이 작원성은 김유신과 백제공주 계선과의 애틋한 전설이 있는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토성의 흔적은 급격하게 없어져가고 있다.

건천서편의 남북으로 놓인 산은 자태가 미려한 구미산이다. 동학교주 최재우가 수도한 곳이며, 대가람이 있던 성산이지만, 3층 석탑만 용명리에서 그 옛날의 모습을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다. 북으로 뻗은 구미산 운대리에서 여근곡이 있는 주사산(740M)을 보는 경치는 가히 일품이라 선덕여왕은 자주 야영을 나왔으며, 서쪽에서 벌어진 백제군과의 전투결과를 기다리기도 했던 나왕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정자 터 인 주춧돌만 남아있다.

단석산 북에 있는 주사산(오봉산)의 서쪽 방위선인 건천 부산성은 화랑인 죽지랑과 득오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주사산 동쪽 능선 아래로는 선덕여왕에 얽힌 여근곡과 그 속의 약수터(옥문지)가 있다. 약수터는 선덕여왕의 불치병을 치료하였으며, 부처님께 그 효험을 빌고 침식을 위해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주사암과 화랑들의 연회장소와 기도장이던 맥반석이 북으로 50M지점에 있으며, 그 바로 밑에는 제법 어시시한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몇 개의 전설이 있다.

북쪽계곡 아래에는 천촌리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신라군의 군량미를 생산하여 보관하던 관아가 있었는데(검둥터), 부임한 사또부와 주사산 동굴에 살고 있던 황금돼지와의 사이에 불륜으로 봉덕이란 아이가 태어나 버려지고 신의 보호를 받은 현장인 봉덕연못이 있으며, 천촌리는 신석기의 고인돌 무덤 군이 있는 등 예로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천촌리에서 마을을 내려가면 도계마을이 있는데 경주에서 유일하게 구석기 유물이 발견될 것을 기대하면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단석산 동쪽의 방내리는 진골계의 고분군과 넓은 들을 앞으로 하고 단석산에 아늑하게 들러 쌓여 언뜻 봐도 자연의 영감을 얻을 것 같은 마을이다. 여기서 우리의 큰 시인 박목월선생께서 태어나셨으며, 경주양송이의 집단 재배지요 고속철도 역사 후보지로 올라있다.


1. 산행일지

(1) 산행일시 : 2005. 03. 19. 07:50 토요일 맑음

(2) 참 석 자 : 전태우, 정병술, 안수성, 심민구, 유명진, 백남기(이상6명)

(3) 산 위 치 : 경주시 건천읍 산내면, 서면

(4) 소요시간 : 16시간
05:20(집 출발) - 06:00(문수구장) - 07:50(ok그린목장 수의저수지) - 07:50(산행 시작) - 17:15(산행 끝) - 18:45(해단식) - 21:20(집 도착)

(5) 산행코스 : 9시간 25분
- 07:52 수의저수지 출발
- 08:04 방주교회
- 08:52 단석산(827.2m)
- 09:21 신선사(식수보충, 국보 마애불상)
- 10:10 우중골 입구
- 10:17 보현암
- 10:23 복구암(영각사)
- 11:24 651.2봉
- 11:39 독고불재(어두목장) - 필요시 식수보충
- 12:16 753봉(산불감시초소)
- 12:39 부산성(남문쪽 성터)
- 13:05 점심시간(30분)
- 14:10 숙재(숲재) - 필요시 식수보충, 비상탈출로
- 14:28 생식마을(식수보충)
- 14:50 사룡산(685m)
- 16:59 굴다리(아화2리)
- 17:16 4번국도(아화주유소)

(6) 산행거리 : 27.7km
수의저수지 - 4.5km - 단석산 - 2.5km - 신선사 - 2.5km - 우중골입구 - 2.5km - 독고불재 - 5.5km - 숙재 - 2.2km - 사룡산 -6.5km - 굴다리 - 1.5km - 아화주유소

(7) 교통수단 : 승합차 2대(백남기, 유명진)

(8) 산행비용 : 170,000원
- 오토바이 임대료 : 10,000원
- 음료 : 10,000원
- 해단식 :110,000원
- 차량지원비 : 40,000원


2. 산행후기

06:00 정각 오늘 집결지인 울산 문수구장 주차장에 6명 모두가 모였다. 승합차 2대로 만불사로 출발하였다. 하산지점에 1대를 두고 다시 OK그린 목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아침에 차량을 이동하는 시간이 1시간  50분 정도 소요하였다. 앞으로 더 많은 이동시간이 소요할 것 같다.

경주가 태권도공원을 유치하려고 할 때 이곳 ok그린목장을 예정지로 하였다고 한다.
07:50분 수의저수지 앞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방주교회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산 능선 위에 자리를 잡고 지워 놓아서 많은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가까이 서보니 건물도 오래 되어 사람들이 오래 동안 사용을 하지 않은 것이 눈에 띠였다. 방주교회를 뒤로 하고 단석산을 향하여 산행을 하였다.

오늘은 정맥 능선을 약간 벗어나 걷기로 하였다. 국보가 있는 신선사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다. 정맥의 회기점을 지나 47분이 지나 단석산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석 바로 옆에 그 유명한 바위가 있었다. 이름하여 김유신장군이 단칼에 베었다는 바위가 실로 쫙 갈라져 있었다.

금정산은 의상대사의 놀이터이고, 천성산은 원효대사, 신불산은 자장대사, 이곳 단석산은 김유신장군의 놀이터인 셈이다.

단석산은 삼국시대의 신라에서는 중악이라고 불렀고, 김유신장군의 수도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청도군의 운문산과 연결되며 그 운문산은 세속오계를 남긴 원광법사가 머물었던 곳이다. 또한 화랑들이 말을 기리고 조련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유신장군의 내력을 보면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 왕족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09:20분 신선사에 도착하였다. 국보 199호로 지정된 마애불상군들을 보기 위해서이다. 바위벽면에 양각으로 조각된 불상들은 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계속 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단석산 기슭은 온통 밤나무와 사과밭이다. 양송이버섯 재배단지로 유명한 방내리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송선리 우중골로 하산을 하였다. 등산객들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단석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물이 많다는 것이다. 우중골로 내려오는 물이 엄청나게 많았다.  

20번 국도에 도착하였다. 도로를 건너 보현암과 복구암(영각사)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등산로가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그래도 가야 할길 무작정 위로 올라갔다.

40분정도 길이 없는 곳을 걸으니 모두들 많이 지쳤다.
 
11:25분 651봉에 도착하였다. 철조망을 따라 계속 하산을 하였다. 이번 산행은 유격훈련을 하는 것 같았다.

10여분을 하산하니 어두목장이 나왔다. 이곳이 독고불재이며, 영남채석장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고, 필요시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할 수가 있다.

30분정도 목장 앞의 길을 따라 다시 능선을 753봉에 도착하니 산불감시초소의 안내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영남채석장의 모습이 산을 통째로 삼키고 있어 보기가 흉물스러웠다.  잠시 숨을 고르고 부산성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12:40분 1m정도 높이 된 성터가 나왔다. 성터를 지나자 예전에는 이곳에서 작물을 재배했던 흔적이 많이 보였다. 성내의 농장을 하였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13:05분 넓은 묘 터가 보였다. 점심시간도 지나고 하여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힘들게 가지고 온 도시락을 펼쳐 놓고 맛있는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식사를 마치고 우리의 목적지로 출발을 하였다. 저 멀리 봉우리가 다섯 개라 하여 오봉산이 보이며 옛날 이름인 주사산의 주사사가 어렴풋이 보였다.

부산성을 지나 숙재로 가는 길에 건천농장의 경고문이 눈에 확 들어왔다. “무단 침입 시 이제까지 잃어버린 염소13마리를 보상하여줄 것”이라는 문구가 농장주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14:10분 우라 2리 이정표를 지나 생식마을이 있는 포장길을 따라 올라갔다. 생식마을에 도착하니 별천지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니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옛날 사람들의 온화한 표정과 편안함이 세속을 떠나 이곳에서 편히 쉬게 하는 것 같다.

생식마을을 뒤로하고 사룡산의 갈림길에서 명진이는 다리의 통증 때문에 하산길로 먼저 출발을 하고, 우리들은 네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사룡산 정상을 가기로 하였다. 10분 정도 가니 정상인데 정상석도 없고 무덤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많은 정맥팀의 리본과 김정길씨의 1365번째 사룡산 답사를 명시하는 이름표가 유독 눈에 띠었다.

명진이를 찾아 계속 하산을 하였다. 20여분의 차이가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아무리가도 나타나지가 않는다. 사룡산에서 고속도로 굴다리까지는 2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다. 중간지점에서 리본을 따라가다가 길이 없어진다. 이번 구간에서는 길을 두 번이나 잃어버렸다. 그러나 목적지인 만불사의 불상은 정확하게 보여서 계속해서 길을 찾아 이어갔다.

차량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인 모양이다. 저 멀리서 보이던 것이 가까이에 다가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굴다리를 지나 만불사까지는 아직 한시간정도 걸리는 것 같다. 지나가는 노인의 오토바이를 잡고 만원을 주면서 만불사 앞까지 태워달라고 하였다. 명진이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들은 아화2리에서 4번국도가 있는 아화주유소로 출발하였다. 시골길을 걷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17:20분 주유소에서 명진이의 차를 만나 7구간 초입을 찾기 위해 만불사로 다시 갔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ok그린목장으로 출발을 하였다.

약속이 있는 민구와 명진이는 같은 차로 출발을 하고 우리 4명은 4구간 때 해단식을 한 산내 정상원조숯불고기집으로 이동하였다. 우리 정맥팀의 새로운 이름인 from Mountain to Mountain(산 따라) → f M t M 으로 정하고 리본도 제작하기로 하였다. 한 구간을 마치고 하산주를 하며서 지나온 산행코스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3. 관광코스

(1) 신선사 : 화랑과 용화정신
김유신장군이 소년시절 신검(神劍)을 얻어 왕성에서 가까운 월생산에 들어 왔다고 한다. 유신은 이 산속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가장 용맹한 검술을 익혔다고 하였다.
여기에 절을 지어 단석사라 불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악의 석굴이 이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의 석굴과 일치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한다.
상인암은 원래 이름이 신선사였고, 주변 바위면에 새겨진 조각상은 미륵삼존(彌勒三尊)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미륵삼존상이란 보살상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선사에는 자연으로 된 석굴에 미륵삼존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남쪽 바위에는 이를 설명해 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김유신 낭도는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화랑들은 용화라고 하는 이름을 즐겨 붙였다. 이 용화는 불교용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미륵이 환생을 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을 하고, 설법 교화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법회를 의미한다. 그 당시 향도(香徒)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결사(信仰結社)의 의미를 뜻한다.

상인암에는 미륵삼존불 말고도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 - 국보199호)이 그려져 있다. 이 석굴은 동남북의 삼면이 병풍처럼 되어 있어서 암바위 석실을 이루고 있어서 이 석굴은 하나의 천연수도처가 되어 있다. 이 암벽에는 크고 작은 10여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고대석굴사원의 경영형태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고 있다.  

이와 같은 단석산의 마애조상이 있는 월생산은 6.25때 전쟁에도 확연히 그 의미가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다. 신라명장 김유신의 용화도 혼과 단석산의 마애조상 염원으로 인민군은 영천 외곽 임포(林浦)일대까지 포진하여 경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2) 부산성 :
건천에서 서쪽 약 4km의 거리에 있는 오봉산(五峯山)에 위치한 신라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일명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의 서쪽에 해당되는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며,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吳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부산((富山) : 부산(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면적은 762,874㎡이다

성 밖의 지형은 사면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위한 천험(天險)의 요새지(要塞地)이며,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에 적합하다. 성문은 4개가 터를 남기고 있으며, 남문 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건물터가 6개소, 우물터가 4개소, 못이 2개, 암문터가 1개에 치성도 2개가 있다.

산성이 위치하는 곳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신라 선덕여왕 때에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 일명 여근곡(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은 뒤, 허술한 신라 도성(都城)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663년(문무왕(文武王) 3)에 경주 남산의 장창(長倉)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쌓은 것이라 여겨지는데, 축성이 3년 만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사암은 신라 의상(義湘)의 창건이라고 전하는데, 이 절터 바로 북쪽에 지맥석(持麥石)이라고 불리는 큰 반석이 있다. 이 반석은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이며,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부산성은 효소왕(孝昭王) 때의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와 관련된 곳으로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서는 이 성을 부산성(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보 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시대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여근곡 :
부산(富山)은 경주시(慶州市)에서 대구(大邱)방면(方面) 약 16km 건천읍(乾川邑)과 산내면(山內面)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높이 640m의 산으로 전설(傳說)과 사적(史蹟)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지리지(地理志)에는 부산(夫山)이라고도 기록(記錄)되었으며, 주사산(朱砂山)과 오봉산(五峯山) 등도 부산내(富山內)에 있는 주사암(朱砂庵)과 오노봉(五老峯) 등에서 온 별칭(別稱)이다. 부산(富山)에서 가장 유명(有名)한 곳이 여근곡(女根谷)이다.

산 지형이 영락없이 여자의 벌리고 있는 다리 가랭이와 그 국부를 닮았다고 하여 여근곡이라 한다. 현재 여근곡에는 유학사라는 조그만한 사찰이 있고,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우물이 있다.

(4) 금척고분 :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앞을 지나는 대구-경주간 국도변의 양쪽에 3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해발 65m 정도의 평지에 고분군(古墳群)이 조성되어 있는데 도로의 서쪽에 분포하는 고분군의 봉토는 비교적 그 규모가 큰 편이며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으나 도로 동쪽의 고분들은 비교적 봉토가 작고 봉토의 훼손도 또한 심한 편이다.


서쪽의 고분들은 잘 정비된 상태로 관리되고 있으나 동쪽에 분포하는 고분의 주위로는 밭, 과수원 등으로 경작되고 있어 고분을 포함한 고분 주변의 훼손이 우려된다. 대형묘는 아니나 봉토들이 완전한 고분들이 있고 고분 중 하나에 금척(金尺)이 부장되어 있다는 속전이 있는 것으로 고 신라의 귀족묘로 추정된다. 1952년 대구-경주간 국도에 의해 봉토의 절반이 파괴된 2기의 고분을 국립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주식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금제세환식(細環式), 호박옥(琥珀玉), 곡옥(曲玉), 철도(鐵刀)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5) 용명리 3층석탑 :
이 삼층석탑은 신라의 성대인 8세기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일제시기 도괴(倒壞)된 부분을 복원할 때 탑신에서 청동불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2중 기단인데, 상하기단면석(上下基壇面石)에는 각각 탱주(撑柱) 2주(柱)로 면석을 3분하고 상하 기단 면석 및 하층기단 갑석은 8매석으로 되어 있다. 상대갑석(上臺甲石)은 4매로 이루어졌으며 하면에는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각 1석이며 각 옥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고 각 층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다. 3층 옥개석 상면에는 원형의 사리공(舍利孔)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남아 있지 않다. 지대석 1변 길이와 지대갑석의 1변 길이가 같다.

(6) 사룡산 :
옛날부터 4마리의 용(龍)이 도사리고 있기에 사룡산(四龍山)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산 꼭대기에 4개의 물이 나는 웅덩이가 있어 4마리의 용(龍)이 목욕을 했다고 한다.

(7) 오봉산 :
높이는 688m로, 여근곡으로 산을 타고 정상에 올라 부산성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와 전설을 느낄 수 있으며 산세와 조망도 뛰어나다. 등산은 건천읍 신평 2리를 기점으로 여근곡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로 들어가 유학사로 간다. 유학사 앞마당에서는 여근곡에서 솟아나는 샘물인 옥문지(玉門池)의 약수를 맛볼 수 있다. 마당을 건너 산속 오솔길에 들어서면 636년 선덕여왕이 매복한 백제군을 섬멸시켰다는 여근곡이 나온다.

울퉁불퉁한 고갯길을 걸어 능선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바위전망대가 있다. 정면으로는 화랑을 느낄 수 있는 부산성의 넓은 평원이, 오른쪽으로는 정상이 보인다. 능선 길을 오르다 오른쪽으로 오르막 샛길로 올라서면 정상이다.

정상에는 1300여 년 전에 의상이 창건했다는 작은 사찰 주사암이 있다. 주사암에서 정상 바로 밑 주차장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부산성으로 가는 길이고, 숲 속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임도에 내려서면 하산길이다. 여기서 하산하면 종주에 3시간 30분 걸리고, 부산성을 거치면 6시간 걸린다. 부산성을 거치려면 돌담 성벽과 밭둑 사이를 지나 산길을 걸으면 부산성 정상에 닿고 여기서 숲을 지나 임도로 내려서 송선 2리로 하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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