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8구간(경주)-삼성산
전태우(09)
작성일
05-04-28 09:27 10,523회
2건
본문
낙동정맥 8구간(경주)
시티재, 봉계리 구간
(경주시 안강읍 안강휴게소 시티재 -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28번 국도가 지나는 낙동정맥의 시티재는 영천서 경주로 들어갈 때 넘게 되는 중요한 고개다. 동서 교류의 길목인 고갯마루에서 서쪽으로 50리쯤 내려가면 영천고을이고, 동쪽으로 30리쯤 내려가면 안강읍이 나오고 곧 강동면인데, 바로 이곳에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반촌인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이 있다. 월손 손씨와 여강 이씨에 의해 형성된 이 마을은 보존상태와 규모, 문화재, 주변환경 등에서 전국의 여러 민속마을 중에서도 빠지지 않은 격조를 갖춘 곳으로 꼽힌다.
지세를 보면, 설창산을 주산으로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골짜기와 능선마다 총 160여 호의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넉넉히 펼쳐져 있다. 또한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200년 이상 된 고가 54호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이 있는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의 집에 사람들이 기거하므로 마을을 둘러볼 때는 집안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산행일지
(1) 산행일시 : 2005. 04. 23. 06:28 토요일. 맑음.
(2) 참 석 자 : 전태우, 안수성, 심민구, 유명진, 백남기, 정용환, 정병술(이상7명)
(3) 산 위 치 : 경주시 안강읍, 포항시 기계면
(4) 소요시간 : 15시간 10분
04:20(집 출발) - 05:00(문수구장) - 06:25(안강휴계소) - 06:27(산행 시작) - 12:00(산행 끝) - 13:30(해단식) - 19:30(집 도착)
(5) 산행코스 : 5시간 30분
- 06:27 시티재(안강휴게소)
- 07:34 532봉(묘)삼성산 갈림길
- 08:13 오룡고개
- 09:04 도덕산 갈림길
- 10:30 봉좌산 갈림길에서 점심(30분) - 200m 뒤의 610봉에서 좌측 능선을 타야함. 우리들은 이곳에서 길을 잘못 들었음.
- 11:34 봉좌산 기도원
- 12:00 포항시 기계면 봉계2리로 하산(합의하에 언양의 해단식 장소로)
(6) 산행거리 : 14km
시티재 - 6km - 오룡고개 - 2km - 570.8봉 - 6km - 봉계2리
(7) 교통수단 : 승합차 2대
(8) 산행비용 : 55,000원
- 통행료 : 5,000원
- 차량지원비 : 20,000원
- 차량대여비 : 30,000원
2. 산행후기
이번 구간은 시티재에서 불랫재까지 27.5km를 가야하나 중간의 이리재로 가는 구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 포항시 기계면 봉계2리로 하산을 하였다. 다시 뒤로 돌아가서 가면 되지만 1시간이상이 소요되고, 또한 fMtM의 단합대회 겸 체력보강을 위하여 언양에 염소고기를 준비하여 놓아 할 수없이 이곳에서 끝내기로 하였다.
오늘은 fMtM의 팀원이 전원 모이는 날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병술이는 허리가 아파서 산행은 포기하고, 하산지점인 불랫재까지 차로 우리를 마중 나와 수송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정용환이가 처음으로 참석한다. 예전에 몰운대에서 안강휴게소까지 정맥길을 탐사하여 이곳 8구간부터 같이 합류하여 산행에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새벽 3시 40분 모닝콜소리에 눈을 뜨니 집사람이 어제 저녁 늦게 테이블 위에 점심도시락을 준비하여 놓았다. 4시 20분 배낭을메고 출발을 하여 조금 가니깐 용환이한테 전화가 왔다. 처음이라 잠을 설쳤다고 한다. 나도 잠을 3시간정도 밖에 자지를 못하였다. 울산과학대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민구를 데리고 로타리에 도착하니 수성이가 늦잠을 잔 모양이다. 문수구장에 5시경에 도착하니 명진이가 오고, 용환이는 과학대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오는 것이 나아 20분정도 걸어서 도착한다. 어제 술을 한잔한 수성이까지 도착하니 5시 20분, 천상입구에서 남기를 태우고 안강휴게소로 출발하였다.
06:25분에 안강휴게소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하고 입산을 하였다. 처음부터 가파른 길이다. 25분정도 올라가니 무덤이 하나 나오는데 이곳이 349.8봉이다.
능선길을 따라 또 가파른 언덕길이 숨을 헐떡이며 10여분을 올라가니 무덤이 하나 나온다. 벌써 시계는 7시35분을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잠깐 쉬기로 하였다. 리본을 달면서 맨 뒤에 오는 수성이가 오늘은 더 늦는 것 같다. 아무래도 어제 먹은 술 탓 인 모양이다.
무덤을 보니 항상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한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이 높은 곳까지 상여를 매고 올라왔는지 궁금하다. 풍수지리에 상당히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을 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삼성산으로 그곳에서 좌측으로 하산길을 택하여 오룡고개로 향하였다.
세 번째로 정맥을 하는 팀을 만났다. 저번 구간에 만난 두 번째 팀과 이번에 만난 세 번째 팀은 각각 2명씩 1조로 산행을 하였다. 10여분 하산을 하고, 다시 10분쯤 오른 봉우리에 무덤 한기가 나오고 내려가니 오룡고개에 도착한다.
08:15분이 되어온다. 2차선 도로를 지나 잠깐 쉬면서 천장산을 보니, 산은 벌거숭이가 다 되어 있고, 길만 지그재그로 나 있어 산이 흉물스러워 보인다. 민구가 가져온 오렌지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출발을 하니 한기의 무덤 옆에서 시티재에서 한티재까지 가는 경주사람 2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11시간정도 산행을 하며 자기네들도 안강휴게소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오룡고개에서 도덕산 갈림길의 능선을 오르는 30여분은 문수산의 깔딱고개를 연상하게 한다. 코가 닿을 정도의 급경사와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 그리고 주먹만한 자갈들이 한걸음, 한걸음 오르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배티재의 8부 능선쯤 오르니 아까 보았던 경주사람 한명이 앞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산을 잘 타는구나 하며 능선에 오르니 먼저 오른 남기와 명진이가 쉬고 있다. 뒤로 민구, 수성, 용환이 뒤따라 올라온다. 모두들 힘이 드는 모양이다. 항상 외롭게 산행을 하였으나 모처럼 사람을 만나니 단체사진도 한 장 찍었다. 09:10분 경주사람들을 뒤로 하고 이리재로 출발을 하였다.
1시간 20여분이 지나자 봉좌산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가지고 온 메모지에 “봉좌산 갈림길에서 왼쪽으로”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다. (봉좌산이라는 팻말이 보이면 610봉으로 돌아가서 왼쪽 이리재로 하산 할 것.)
10:30분 이런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이리재로 하산을 하여 다시 운주산을 오르려면 힘이 들기 때문이다. 가지고 온 음식을 내 놓고 30여분동안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주변에 이상하게 정맥 리본이 하나만 보이고 주의에는 없었다. “모든 일이 하기 싫어하면 그것이 오른 일처럼 모두들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쨌던 이리재로 하산을 하는 길이라 생각을 하고, 하산을 하는데 하면 할수록 기분이 이상하였다. 정맥길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고 능선을 확인하기 위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확인을 하였다. 민구 왈 “뒤로 후퇴는 없다. 오르지 전진만이 우리의 갈 길이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전진을 하여 하산을 하니 봉좌산 기도원이 나온다.
11:20분 “이왕 이렇게 된 것, 오늘은 이곳에서 끝내고 다음부터 이리재에서 시작하기로 하자.”고 의견 합의를 보았다. “오늘 오후에 언양에 주문해 놓은 염소고기도 있으니깐 후회를 하지 말고, 하루를 편안하게 몸보신하기로 하자.”하면서 포항시 기계면 봉계2리로 하산을 하였다.
마침 지나가는 승합차를 잡고 운전기사인 아줌마와 삼만원에 합의를 보고 안강휴게소까지 차를 타고 왔다. 병술이와 연락을 하고 언양에 도착하여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병술이는 부인과 같이 딸기 한바구니를 마트에서 사가지고 와서 고생한다고 한다.
소리 없이 모두들 배를 채운다. 배가 불러오니 족구를 하자고 한다. 게임은 승패가 있어 항상 경쟁심을 유발하게 한다. 산행 후의 나른함과 식사 후의 포만감 그리고 운동 후의 피곤함이 우리 모두들을 지치게 한다. 게임 후 명진의 차로 구영리와 무거동 그리고 문수구장에 내려주고 해산을 하였다.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사전에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 수고 많았습니다.
3. 관광코스
(1) 옥산서원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書院)으로 1572년(선조 5년)에 창건되었다.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조선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도학으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태극문(太極門) 안에는 임금이 쓴 글씨와 편지, 회재선생(晦齋先生)의 글씨,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글씨를 비롯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완전 1질이 보관되어 있어서 학술연구(學術硏究)에 좋은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獨樂堂)(보물(寶物) 제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만하는 공간),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 사당,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서원(書院) 내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낙향하여 학문에 몰입하던 곳으로, 주위에 수려한 정자와 계곡이 어울려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또 독락당(獨樂堂) 뒷편 정혜사지(淨惠寺地)에는 일반탑과 판이하게 다른 양식의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地十三層石塔)이 세워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2)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 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서 원 위치에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基壇(기단)은 單層土築(단층토축)이다. 土臺(토대)의 上面(상면)에 1단의 石築(석축)이 마련되고 그 위에 四放石(사방석)으로 구성된 높직한 2단의 方形(방형)의 괴임이 설치되었으며, 그 위에 13층의 塔身(탑신)을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괴임들은 곧 기단부 甲石(갑석) 上面(상면)의 괴임대 수법으로서 현재는 마치 地臺石(지대석)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탑신은 13층의 身·蓋石(신·개석)으로 건립되었는데, 특히 初層(초층)의 탑신과 옥개가 큰 규모로 造成(조성)되고, 그 위의 2층부터는 아주 작아졌다. 초층 탑신은 네 귀에 方形(방형)의 石柱(석주)를 隅柱(우주)로 세우고, 隅柱(우주) 안으로 역시 1석씩으로 된 석주와 引放(인방)과 下放(하방)을 걸쳤다. 초층 屋蓋石(옥개석)은 築石(축석)과 下面(하면) 받침부가 別石(별석)인데 3단이다. 초층 옥개석 위에 1매 板石(판석)으로 된 1단의 괴임돌을 놓아 2층 이상의 탑신을 받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신·개석이 급격히 작아져서 마치 초층에 얹혀있는 相輪部(상륜부)와도 같이 보인다. 신·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 특히 탑신은 작아져서 옥개석 위에 마련된 탑신괴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相輪部(상륜부)는 露盤(노반)만이 남아 있는데,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 석탑은 보기드문 13층의 탑이고, 2층 이상의 遞減比率(체감비율)이 특이하며 초층 탑신 4면의 龕室(감실)과 아울러 기단부 축조가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 연혁(유래)
이 석탑은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9m 높이로 13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1층 탑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탑의 1층 몸체에는 높이 131cm, 폭 166cm인 모서리 기둥이 있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2층부터는 너비와 높이가 갑작스럽게 줄어들었으며 몸체돌과 지붕돌이 같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 그 양식이 특이하다.
지붕은 경사가 느린데 모서리는 볼록하고 처마 층급 받침은 3단이다. 석탑 주변에는 주춧돌과 기왓장들이 흩어져 있고 정혜사지라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시티재, 봉계리 구간
(경주시 안강읍 안강휴게소 시티재 -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28번 국도가 지나는 낙동정맥의 시티재는 영천서 경주로 들어갈 때 넘게 되는 중요한 고개다. 동서 교류의 길목인 고갯마루에서 서쪽으로 50리쯤 내려가면 영천고을이고, 동쪽으로 30리쯤 내려가면 안강읍이 나오고 곧 강동면인데, 바로 이곳에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반촌인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이 있다. 월손 손씨와 여강 이씨에 의해 형성된 이 마을은 보존상태와 규모, 문화재, 주변환경 등에서 전국의 여러 민속마을 중에서도 빠지지 않은 격조를 갖춘 곳으로 꼽힌다.
지세를 보면, 설창산을 주산으로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골짜기와 능선마다 총 160여 호의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넉넉히 펼쳐져 있다. 또한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200년 이상 된 고가 54호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이 있는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의 집에 사람들이 기거하므로 마을을 둘러볼 때는 집안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산행일지
(1) 산행일시 : 2005. 04. 23. 06:28 토요일. 맑음.
(2) 참 석 자 : 전태우, 안수성, 심민구, 유명진, 백남기, 정용환, 정병술(이상7명)
(3) 산 위 치 : 경주시 안강읍, 포항시 기계면
(4) 소요시간 : 15시간 10분
04:20(집 출발) - 05:00(문수구장) - 06:25(안강휴계소) - 06:27(산행 시작) - 12:00(산행 끝) - 13:30(해단식) - 19:30(집 도착)
(5) 산행코스 : 5시간 30분
- 06:27 시티재(안강휴게소)
- 07:34 532봉(묘)삼성산 갈림길
- 08:13 오룡고개
- 09:04 도덕산 갈림길
- 10:30 봉좌산 갈림길에서 점심(30분) - 200m 뒤의 610봉에서 좌측 능선을 타야함. 우리들은 이곳에서 길을 잘못 들었음.
- 11:34 봉좌산 기도원
- 12:00 포항시 기계면 봉계2리로 하산(합의하에 언양의 해단식 장소로)
(6) 산행거리 : 14km
시티재 - 6km - 오룡고개 - 2km - 570.8봉 - 6km - 봉계2리
(7) 교통수단 : 승합차 2대
(8) 산행비용 : 55,000원
- 통행료 : 5,000원
- 차량지원비 : 20,000원
- 차량대여비 : 30,000원
2. 산행후기
이번 구간은 시티재에서 불랫재까지 27.5km를 가야하나 중간의 이리재로 가는 구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 포항시 기계면 봉계2리로 하산을 하였다. 다시 뒤로 돌아가서 가면 되지만 1시간이상이 소요되고, 또한 fMtM의 단합대회 겸 체력보강을 위하여 언양에 염소고기를 준비하여 놓아 할 수없이 이곳에서 끝내기로 하였다.
오늘은 fMtM의 팀원이 전원 모이는 날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병술이는 허리가 아파서 산행은 포기하고, 하산지점인 불랫재까지 차로 우리를 마중 나와 수송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정용환이가 처음으로 참석한다. 예전에 몰운대에서 안강휴게소까지 정맥길을 탐사하여 이곳 8구간부터 같이 합류하여 산행에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새벽 3시 40분 모닝콜소리에 눈을 뜨니 집사람이 어제 저녁 늦게 테이블 위에 점심도시락을 준비하여 놓았다. 4시 20분 배낭을메고 출발을 하여 조금 가니깐 용환이한테 전화가 왔다. 처음이라 잠을 설쳤다고 한다. 나도 잠을 3시간정도 밖에 자지를 못하였다. 울산과학대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민구를 데리고 로타리에 도착하니 수성이가 늦잠을 잔 모양이다. 문수구장에 5시경에 도착하니 명진이가 오고, 용환이는 과학대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오는 것이 나아 20분정도 걸어서 도착한다. 어제 술을 한잔한 수성이까지 도착하니 5시 20분, 천상입구에서 남기를 태우고 안강휴게소로 출발하였다.
06:25분에 안강휴게소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하고 입산을 하였다. 처음부터 가파른 길이다. 25분정도 올라가니 무덤이 하나 나오는데 이곳이 349.8봉이다.
능선길을 따라 또 가파른 언덕길이 숨을 헐떡이며 10여분을 올라가니 무덤이 하나 나온다. 벌써 시계는 7시35분을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잠깐 쉬기로 하였다. 리본을 달면서 맨 뒤에 오는 수성이가 오늘은 더 늦는 것 같다. 아무래도 어제 먹은 술 탓 인 모양이다.
무덤을 보니 항상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한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이 높은 곳까지 상여를 매고 올라왔는지 궁금하다. 풍수지리에 상당히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을 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삼성산으로 그곳에서 좌측으로 하산길을 택하여 오룡고개로 향하였다.
세 번째로 정맥을 하는 팀을 만났다. 저번 구간에 만난 두 번째 팀과 이번에 만난 세 번째 팀은 각각 2명씩 1조로 산행을 하였다. 10여분 하산을 하고, 다시 10분쯤 오른 봉우리에 무덤 한기가 나오고 내려가니 오룡고개에 도착한다.
08:15분이 되어온다. 2차선 도로를 지나 잠깐 쉬면서 천장산을 보니, 산은 벌거숭이가 다 되어 있고, 길만 지그재그로 나 있어 산이 흉물스러워 보인다. 민구가 가져온 오렌지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출발을 하니 한기의 무덤 옆에서 시티재에서 한티재까지 가는 경주사람 2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11시간정도 산행을 하며 자기네들도 안강휴게소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오룡고개에서 도덕산 갈림길의 능선을 오르는 30여분은 문수산의 깔딱고개를 연상하게 한다. 코가 닿을 정도의 급경사와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 그리고 주먹만한 자갈들이 한걸음, 한걸음 오르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배티재의 8부 능선쯤 오르니 아까 보았던 경주사람 한명이 앞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산을 잘 타는구나 하며 능선에 오르니 먼저 오른 남기와 명진이가 쉬고 있다. 뒤로 민구, 수성, 용환이 뒤따라 올라온다. 모두들 힘이 드는 모양이다. 항상 외롭게 산행을 하였으나 모처럼 사람을 만나니 단체사진도 한 장 찍었다. 09:10분 경주사람들을 뒤로 하고 이리재로 출발을 하였다.
1시간 20여분이 지나자 봉좌산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가지고 온 메모지에 “봉좌산 갈림길에서 왼쪽으로”이라는 메모가 되어 있었다. (봉좌산이라는 팻말이 보이면 610봉으로 돌아가서 왼쪽 이리재로 하산 할 것.)
10:30분 이런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이리재로 하산을 하여 다시 운주산을 오르려면 힘이 들기 때문이다. 가지고 온 음식을 내 놓고 30여분동안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주변에 이상하게 정맥 리본이 하나만 보이고 주의에는 없었다. “모든 일이 하기 싫어하면 그것이 오른 일처럼 모두들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쨌던 이리재로 하산을 하는 길이라 생각을 하고, 하산을 하는데 하면 할수록 기분이 이상하였다. 정맥길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고 능선을 확인하기 위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확인을 하였다. 민구 왈 “뒤로 후퇴는 없다. 오르지 전진만이 우리의 갈 길이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전진을 하여 하산을 하니 봉좌산 기도원이 나온다.
11:20분 “이왕 이렇게 된 것, 오늘은 이곳에서 끝내고 다음부터 이리재에서 시작하기로 하자.”고 의견 합의를 보았다. “오늘 오후에 언양에 주문해 놓은 염소고기도 있으니깐 후회를 하지 말고, 하루를 편안하게 몸보신하기로 하자.”하면서 포항시 기계면 봉계2리로 하산을 하였다.
마침 지나가는 승합차를 잡고 운전기사인 아줌마와 삼만원에 합의를 보고 안강휴게소까지 차를 타고 왔다. 병술이와 연락을 하고 언양에 도착하여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병술이는 부인과 같이 딸기 한바구니를 마트에서 사가지고 와서 고생한다고 한다.
소리 없이 모두들 배를 채운다. 배가 불러오니 족구를 하자고 한다. 게임은 승패가 있어 항상 경쟁심을 유발하게 한다. 산행 후의 나른함과 식사 후의 포만감 그리고 운동 후의 피곤함이 우리 모두들을 지치게 한다. 게임 후 명진의 차로 구영리와 무거동 그리고 문수구장에 내려주고 해산을 하였다.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사전에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 수고 많았습니다.
3. 관광코스
(1) 옥산서원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書院)으로 1572년(선조 5년)에 창건되었다.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조선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도학으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태극문(太極門) 안에는 임금이 쓴 글씨와 편지, 회재선생(晦齋先生)의 글씨,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글씨를 비롯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완전 1질이 보관되어 있어서 학술연구(學術硏究)에 좋은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獨樂堂)(보물(寶物) 제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만하는 공간),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 사당,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서원(書院) 내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낙향하여 학문에 몰입하던 곳으로, 주위에 수려한 정자와 계곡이 어울려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또 독락당(獨樂堂) 뒷편 정혜사지(淨惠寺地)에는 일반탑과 판이하게 다른 양식의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地十三層石塔)이 세워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2)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 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서 원 위치에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基壇(기단)은 單層土築(단층토축)이다. 土臺(토대)의 上面(상면)에 1단의 石築(석축)이 마련되고 그 위에 四放石(사방석)으로 구성된 높직한 2단의 方形(방형)의 괴임이 설치되었으며, 그 위에 13층의 塔身(탑신)을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괴임들은 곧 기단부 甲石(갑석) 上面(상면)의 괴임대 수법으로서 현재는 마치 地臺石(지대석)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탑신은 13층의 身·蓋石(신·개석)으로 건립되었는데, 특히 初層(초층)의 탑신과 옥개가 큰 규모로 造成(조성)되고, 그 위의 2층부터는 아주 작아졌다. 초층 탑신은 네 귀에 方形(방형)의 石柱(석주)를 隅柱(우주)로 세우고, 隅柱(우주) 안으로 역시 1석씩으로 된 석주와 引放(인방)과 下放(하방)을 걸쳤다. 초층 屋蓋石(옥개석)은 築石(축석)과 下面(하면) 받침부가 別石(별석)인데 3단이다. 초층 옥개석 위에 1매 板石(판석)으로 된 1단의 괴임돌을 놓아 2층 이상의 탑신을 받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신·개석이 급격히 작아져서 마치 초층에 얹혀있는 相輪部(상륜부)와도 같이 보인다. 신·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 특히 탑신은 작아져서 옥개석 위에 마련된 탑신괴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相輪部(상륜부)는 露盤(노반)만이 남아 있는데,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 석탑은 보기드문 13층의 탑이고, 2층 이상의 遞減比率(체감비율)이 특이하며 초층 탑신 4면의 龕室(감실)과 아울러 기단부 축조가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 연혁(유래)
이 석탑은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9m 높이로 13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1층 탑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탑의 1층 몸체에는 높이 131cm, 폭 166cm인 모서리 기둥이 있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2층부터는 너비와 높이가 갑작스럽게 줄어들었으며 몸체돌과 지붕돌이 같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 그 양식이 특이하다.
지붕은 경사가 느린데 모서리는 볼록하고 처마 층급 받침은 3단이다. 석탑 주변에는 주춧돌과 기왓장들이 흩어져 있고 정혜사지라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