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최승건(15)
작성일
06-03-16 00:19 9,504회
1건
본문
1. 주당야기 (晝撞夜碁)
고조선 초대 백수왕 당태호(撞泰虎) 가 어느 마을에 들렀을때의 일이다.
당구장에서 한 다마를 친후 노을지는 논두렁을 따라 길을 가고
있을때였다. 조금전 당구칠때 본 청년이 자기집 툇마루에 앉아
딱,딱 소리도 경쾌하게 홀로 바둑을 두고 있는것이 아닌가?
"저 청년은 낮에는 당구를, 밤에는 바둑을 두고 있구나.
저다지도 할일이 없을수가? 너희들은 모두 저 청년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아 밤낮없이 세월을 때우는데 열중하도록 하여라.."
이와같이 한마디를 했으니 그때 당태호(撞泰虎)가 말한
주당야기(晝撞夜碁)는 오늘날까지도 5백만 백수들의 생활신조가 되어 있다.
2. 한당고기 (漢撞高碁)
서력 2세기, 한반도에서는 고구려(高句麗) 가 삼국중 가장 먼저
태조왕에 의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후한(後漢)이 넘쳐나는 백수들로 인해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
후한(後漢)에서 천오백다마를 치던 당구신(黨區申)이라는 사내는
상당한 다마에도 불구하고 후한에서는 명함조차 내밀 길이 없자
고구려로 망명하기 이르렀다.
고구려에 도착한 당구신(黨區申)은 이르는 고을마다 고구려의
물다마들을 격파하니, 이윽고 고구려에서는 그를 당구의 신
(撞球之神) 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쭐해진 당구신(黨區申)은 이참에 자신의 바둑실력도 뽐내고자
각 고을의 기원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들른 곳
에서부터, 원장에게 만방으로 진것을 비롯해 그 기원의 최고하수라는
십팔급(拾捌急) 이란 사내에게도 두집 반을 지고 말았다.
당구신(黨區申)은 탄식하며 말한다.
"한나라는 당구, 고구려는 바둑이로구나. 아아 이것이 바로
한나라가 쇠퇴하고 고구려가 흥하기 시작하는 이유로다.
후세의 백수들은 이를 거울삼아 당구보다는 정신을 수양하는 바둑
으로 조금더 많은 시간을 때워야 할것이다"
이때 그가 말한 "한나라는 당구, 고구려는 바둑" (漢撞高碁)는
오늘날까지도 5백만 백수들이 시간을 때우는데 첫번째로 떠올려야하는
필수지침이 되고 있다.
3. 기절당풍 (碁切撞風)
서력 4세기 말, 고구려 소수림왕때의 일이다. 소수림왕은 불교의 수입,
태학의 설립 등 문화발전에 힘을 쏟으며 동시에 자신의 기력(碁力)
향상에 아낌없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이때까지도 고구려는 당구보다는
바둑을 중시하는 점잖은 백수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를 통치하던 근초고왕은 무지막지한 북진정책을 펴며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영토전쟁보다 문화발전에 관심이 많던 소수림왕은 한가지 꾀를
내었다. 사람들의 전쟁보다는 돌들의 전쟁이 어떤가? 그는 백제
근초고왕에게 영토의 일부분을 건 바둑3번기를 신청하게 되었다.
장소는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 아무래도 자신의 기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 소수림왕에게는 어웨이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꺾는것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백제의 만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뜻밖에 자신만만한 플레이를
펼친 근초고왕에게 그는 2판을 내리 지고 말았다.
고구려로 돌아온 소수림왕은 다시는 바둑돌을 쳐다보기 싫어졌다.
스스로 바둑을 끊는데 못이겨 전국에 바둑금지령을 내려버린 것이다.
200여군데의 기원은 폐쇄되고 바둑을 두다가 눈에 띄는 자는 쌀 50석의
벌금형 혹은 똥침 50회의 태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바둑의 나라 고구려에서 주업을 잃은 백수들은 하루 이틀 멍하게
지내다가 드디어 당구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니, 단 한달만에 고구려 전역에는
200여군데의 신생당구장이 생기는등 일약 당구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선조들의 뜻을 저버리고 바둑을 금지시킨 소수림왕의 한탄,
"바둑을 근절시키니 (碁切) 당구의 바람이 부는구나 (撞風).
어차피 백수들은 무엇한가지라도 해야 하는것을 내 몰랐도다.
앞으로 다시 바둑을 장려할테니 백수들은 계속 정신 수양에 힘쓰라"
그러나 한번 불어닥친 당구의 바람은 쉬 꺼지지 않았다. 갓 80, 100다마를
치기 시작한 백수들의 눈엔 바둑알대신 당구공만이 아른거렸던 것이다.
당시의 일을 기록한 고구려의 백수사기(白手史記)에는 이러한 소수림왕의
한탄을 기절당풍(碁切撞風) 이라 표현했으며, 또한 이 속뜻은
"백수가 한가지를 끊어본들 또다른 백수짓에 빠지기 마련이다.
몸부림치지 말고 돈 적게드는 쪽으로 한우물을 파라."
이와같은 교훈으로 남아 오늘날 오백만 백수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4. 당기사병 (撞碁思病)
서력 15세기 조선초, 당시의 군사제도는 16세에서 60세의 양민들이
복무하는 정군(正軍, 오늘날의 정규군), 왕족과 공신, 고급 관료들의
특수군(特殊軍, 장교급), 그리고 잡색군(雜色軍, 오늘날의 방위)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노비들은 신분의 자유가 없는대신
정군에 나가지 않고 필요시에 잡색군으로 편성되었다.
고조선시절부터 내려온 백수왕 당태호(撞泰虎)의 38대후손 당태균(撞泰菌)은
고려 전복당시 끝까지 고려의 백수관리체제를 흠모하며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 안기부에 잡혀가 노비신분으로 추락한 바 있었다.
그의 손자이자 40대 백수왕 당태지(撞泰知)는 역사에 길이남을 인물이었다.
그의 당구와 바둑실력은 각각 천다마와 아마7단이었으며, 이외에도
출중한 인물과 노래,춤,랩솜씨까지 겸비하여 당시 양반집 규수들 중에도
그를 흠모하여 눈물까지 흘리는이가 허다했다.
이는 당시 문서상으로 당태지(撞泰知)의 노비소유권을 가진 장지회(章知淮)가,
어린시절부터 이미 노비로 썩기에는 아까운 인물임을 직감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기예(技藝)를 연마하도록 내버려 둔 결과였다.
이쯤되니 당태지에게는 조부(祖父) 당태균때부터 노비로 전락한것이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정군으로 입대하는 대신 잡색군으로 나가거나
혹은 아예 면제받을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그의 재능을 높이산 각계의 양반들이, 그를 양민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그당시 재능우선주의(才能優先主義)를 펼친 세종대왕 (왕위 1418-1450)
에게 탄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들의 딸자식이
"태지오빠!!" 를 외치며 거품을 무는 바로 그 대상이 노비라는 사실은
양반들의 자존심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세종대왕의 현명한
판단 아래 1432년 백수왕 당씨가문은 다시 양민으로 지위를 승격받기에 이른다.
통재라, 당태지(撞泰知)는 양민승격과 동시에 입영통지서를 받게 된것이다.
그는 수많은 기자들의 플러쉬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 은퇴식을 가졌다.
"이 내몸, 이제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간다. 수많은 여자와 노래와 춤은
잊을 수 있지만 백수의 본분 당구와 바둑만은 잊을 수 없구나. 어쩌면
그것들을 그리며 시름시름 앓게 될지도 모른다. 고기는 물 속에서
살아야 하는법, 나는 어찌 살란 말인가"
결국 그는 입대한지 10개월만에 상사병(相思病) 판정을 받아 조기제대한다.
조선백조실록 (朝鮮白祖實錄, 조선시대 백수 선조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
에는 그당시 당태지가 앓았던 병을 당기사병(撞碁思病) 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당시의 교훈을 이어 오늘날에도 출중한 백수들을 위해
단기사병제도가 면면히 이어내려져 오고 있는 것이다.
40대 백수왕 당태지(撞泰知)의 혁혁한 공헌은 오늘날까지도 오백만
백수들의 가슴에 신화로 남아 있다.
고조선 초대 백수왕 당태호(撞泰虎) 가 어느 마을에 들렀을때의 일이다.
당구장에서 한 다마를 친후 노을지는 논두렁을 따라 길을 가고
있을때였다. 조금전 당구칠때 본 청년이 자기집 툇마루에 앉아
딱,딱 소리도 경쾌하게 홀로 바둑을 두고 있는것이 아닌가?
"저 청년은 낮에는 당구를, 밤에는 바둑을 두고 있구나.
저다지도 할일이 없을수가? 너희들은 모두 저 청년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아 밤낮없이 세월을 때우는데 열중하도록 하여라.."
이와같이 한마디를 했으니 그때 당태호(撞泰虎)가 말한
주당야기(晝撞夜碁)는 오늘날까지도 5백만 백수들의 생활신조가 되어 있다.
2. 한당고기 (漢撞高碁)
서력 2세기, 한반도에서는 고구려(高句麗) 가 삼국중 가장 먼저
태조왕에 의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후한(後漢)이 넘쳐나는 백수들로 인해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
후한(後漢)에서 천오백다마를 치던 당구신(黨區申)이라는 사내는
상당한 다마에도 불구하고 후한에서는 명함조차 내밀 길이 없자
고구려로 망명하기 이르렀다.
고구려에 도착한 당구신(黨區申)은 이르는 고을마다 고구려의
물다마들을 격파하니, 이윽고 고구려에서는 그를 당구의 신
(撞球之神) 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쭐해진 당구신(黨區申)은 이참에 자신의 바둑실력도 뽐내고자
각 고을의 기원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들른 곳
에서부터, 원장에게 만방으로 진것을 비롯해 그 기원의 최고하수라는
십팔급(拾捌急) 이란 사내에게도 두집 반을 지고 말았다.
당구신(黨區申)은 탄식하며 말한다.
"한나라는 당구, 고구려는 바둑이로구나. 아아 이것이 바로
한나라가 쇠퇴하고 고구려가 흥하기 시작하는 이유로다.
후세의 백수들은 이를 거울삼아 당구보다는 정신을 수양하는 바둑
으로 조금더 많은 시간을 때워야 할것이다"
이때 그가 말한 "한나라는 당구, 고구려는 바둑" (漢撞高碁)는
오늘날까지도 5백만 백수들이 시간을 때우는데 첫번째로 떠올려야하는
필수지침이 되고 있다.
3. 기절당풍 (碁切撞風)
서력 4세기 말, 고구려 소수림왕때의 일이다. 소수림왕은 불교의 수입,
태학의 설립 등 문화발전에 힘을 쏟으며 동시에 자신의 기력(碁力)
향상에 아낌없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이때까지도 고구려는 당구보다는
바둑을 중시하는 점잖은 백수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를 통치하던 근초고왕은 무지막지한 북진정책을 펴며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영토전쟁보다 문화발전에 관심이 많던 소수림왕은 한가지 꾀를
내었다. 사람들의 전쟁보다는 돌들의 전쟁이 어떤가? 그는 백제
근초고왕에게 영토의 일부분을 건 바둑3번기를 신청하게 되었다.
장소는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 아무래도 자신의 기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 소수림왕에게는 어웨이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꺾는것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백제의 만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뜻밖에 자신만만한 플레이를
펼친 근초고왕에게 그는 2판을 내리 지고 말았다.
고구려로 돌아온 소수림왕은 다시는 바둑돌을 쳐다보기 싫어졌다.
스스로 바둑을 끊는데 못이겨 전국에 바둑금지령을 내려버린 것이다.
200여군데의 기원은 폐쇄되고 바둑을 두다가 눈에 띄는 자는 쌀 50석의
벌금형 혹은 똥침 50회의 태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바둑의 나라 고구려에서 주업을 잃은 백수들은 하루 이틀 멍하게
지내다가 드디어 당구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니, 단 한달만에 고구려 전역에는
200여군데의 신생당구장이 생기는등 일약 당구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선조들의 뜻을 저버리고 바둑을 금지시킨 소수림왕의 한탄,
"바둑을 근절시키니 (碁切) 당구의 바람이 부는구나 (撞風).
어차피 백수들은 무엇한가지라도 해야 하는것을 내 몰랐도다.
앞으로 다시 바둑을 장려할테니 백수들은 계속 정신 수양에 힘쓰라"
그러나 한번 불어닥친 당구의 바람은 쉬 꺼지지 않았다. 갓 80, 100다마를
치기 시작한 백수들의 눈엔 바둑알대신 당구공만이 아른거렸던 것이다.
당시의 일을 기록한 고구려의 백수사기(白手史記)에는 이러한 소수림왕의
한탄을 기절당풍(碁切撞風) 이라 표현했으며, 또한 이 속뜻은
"백수가 한가지를 끊어본들 또다른 백수짓에 빠지기 마련이다.
몸부림치지 말고 돈 적게드는 쪽으로 한우물을 파라."
이와같은 교훈으로 남아 오늘날 오백만 백수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4. 당기사병 (撞碁思病)
서력 15세기 조선초, 당시의 군사제도는 16세에서 60세의 양민들이
복무하는 정군(正軍, 오늘날의 정규군), 왕족과 공신, 고급 관료들의
특수군(特殊軍, 장교급), 그리고 잡색군(雜色軍, 오늘날의 방위)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노비들은 신분의 자유가 없는대신
정군에 나가지 않고 필요시에 잡색군으로 편성되었다.
고조선시절부터 내려온 백수왕 당태호(撞泰虎)의 38대후손 당태균(撞泰菌)은
고려 전복당시 끝까지 고려의 백수관리체제를 흠모하며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 안기부에 잡혀가 노비신분으로 추락한 바 있었다.
그의 손자이자 40대 백수왕 당태지(撞泰知)는 역사에 길이남을 인물이었다.
그의 당구와 바둑실력은 각각 천다마와 아마7단이었으며, 이외에도
출중한 인물과 노래,춤,랩솜씨까지 겸비하여 당시 양반집 규수들 중에도
그를 흠모하여 눈물까지 흘리는이가 허다했다.
이는 당시 문서상으로 당태지(撞泰知)의 노비소유권을 가진 장지회(章知淮)가,
어린시절부터 이미 노비로 썩기에는 아까운 인물임을 직감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기예(技藝)를 연마하도록 내버려 둔 결과였다.
이쯤되니 당태지에게는 조부(祖父) 당태균때부터 노비로 전락한것이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정군으로 입대하는 대신 잡색군으로 나가거나
혹은 아예 면제받을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그의 재능을 높이산 각계의 양반들이, 그를 양민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그당시 재능우선주의(才能優先主義)를 펼친 세종대왕 (왕위 1418-1450)
에게 탄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들의 딸자식이
"태지오빠!!" 를 외치며 거품을 무는 바로 그 대상이 노비라는 사실은
양반들의 자존심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세종대왕의 현명한
판단 아래 1432년 백수왕 당씨가문은 다시 양민으로 지위를 승격받기에 이른다.
통재라, 당태지(撞泰知)는 양민승격과 동시에 입영통지서를 받게 된것이다.
그는 수많은 기자들의 플러쉬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 은퇴식을 가졌다.
"이 내몸, 이제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간다. 수많은 여자와 노래와 춤은
잊을 수 있지만 백수의 본분 당구와 바둑만은 잊을 수 없구나. 어쩌면
그것들을 그리며 시름시름 앓게 될지도 모른다. 고기는 물 속에서
살아야 하는법, 나는 어찌 살란 말인가"
결국 그는 입대한지 10개월만에 상사병(相思病) 판정을 받아 조기제대한다.
조선백조실록 (朝鮮白祖實錄, 조선시대 백수 선조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
에는 그당시 당태지가 앓았던 병을 당기사병(撞碁思病) 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당시의 교훈을 이어 오늘날에도 출중한 백수들을 위해
단기사병제도가 면면히 이어내려져 오고 있는 것이다.
40대 백수왕 당태지(撞泰知)의 혁혁한 공헌은 오늘날까지도 오백만
백수들의 가슴에 신화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