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아직도 간직해야만 한다.
김잠출(07)
작성일
06-06-20 15:13 10,48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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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진이나 기타 글이 안 올라 와 사무실에서 급하게 적습니다. 긴 글 이해하시고 읽어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지난 2-30대, 나는 하루하루 출근 때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의 심정으로 다짐하고 또 뛰었다. 참 부지런히도 일했고 가정과 자녀 일은 전부 아내에게 맡겨 둘 정도였다.
빨간 버슬 타고 무룡산 넘어 온 촌놈이 전국적으로 이름께나 알리고 사내에서나 업계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면 이 길 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열정을 불살랐다.
지나간 청춘을 반추해보면 그 밑바닥에 있는 저력은 바로 열정이었다.
열정!- 아직도 우리는 식지않는 열정을 간직하고 있어야한다.
사보를 보다가 우연히 서울엠비시 정길화 특보의 글이 눈에 띄어 옮겨 적는다. 찬찬히 읽어보고 음미하시길....(정길화특보는 PD수첩 초기 진행자였고 이제는 말한다 시리즈 팀장을 역임한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한국의 간판 PD임)
------열정에 관하여-정길화(MBC 사장 특보)
<연탄재>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안도현의 작품이다.
발로 차지는 말아라
네가 언제 남을 위해 그렇게 타오른 적이 있었더냐
아마도 대부분 한 번쯤은 이 시를 접했을 것이라 믿는다. 짧고 간명하여 언어적 조탁의 극치를 이루는 시. 마치 일본 문학의 하이구(俳句)를 연상하게 하는, 자연과 인생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포착한 이 시구는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애송된다. 그런데 이 시의 원래 제목과 내용은 이와는 다르다. 구전되는 가운데 혹은 인터넷에서 함부로 퍼다 나르는 과정에서 필경 착오가 발생했을 것이다. 본시는 <너에게 묻는다>가 제목이다. 시구(詩句)도 조금은 다르다. 이는 안도현 시인에게 직접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본(異本)이든 정본(正本)이든 시인의 에스프리는 훼손되지 않는다. 안도현은 함부로 버려지는 연탄재를 보며 그것이 불타올랐던 때의 본질을 통찰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는 절구(絶句)를 안겨주는 것이다. 정말 내가 언제 남을 위해 뜨겁게 불타본 적이 있다고, 그래서 이제는 재만 남도록 치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연탄재를 발로 찰 수 있을 것인가. 못할 일이다. 부끄러워서라도 차마 못할 일이다....
시인의 영감은 연탄재를 보며 연탄을 추상(抽象)한다. 골목길 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연탄재를 무심히 발로 차는 세인의 인심을 보며 그는 연탄의 화염(火焰)을 기억한다. 그리고 진실로 누군가를 위해 불타올랐던 자만이 들려주는 생생한 육성을 대신 말하는 것이다. 그는 불붙어 있을 때 연탄만도 못한 세인들이 감히 연탄재를 차는 것에 경종을 울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연탄의 불은 그의 정열이다. 호올로 불타올라, 그는 한 세대 전의 한국인들에게 광열(光熱)을 제공했다. 비록 간헐적으로 일산화탄소로 인한 중독 사고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용자의 부주의일 뿐,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들어가는 자리를 탐하지 않았고 자신의 조건과 처지를 따지지 않았다. 불문이 열리면 안간힘으로 불구멍을 맞추어 불기를 피워 올렸다. 최선을 다해 열을 지피면서 발열과 취사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재로 남았다.
안도현은 <연탄 한 장>이라는 다른 시에서 이르기를,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것이 두려워 /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했네
라고 말하며 그의 ‘본심’을 토로하고 있다. 그가 <너에게 묻는다>에서 왜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재가 되는 것이 두려워 한 번도 타오르지 못한 인생. 그것은 그저 허접한 석탄 뭉치일 뿐이다. 연탄이 타오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 때문이다. 연탄재는 비로소 시인을 넘어 우리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지만, 타올라야 할 때 타오르지 못한 인생은 굳어버린 채 세월의 더께가 된다. 타인을 탓하고, 남을 허물하기보다 찬연히 타올라 소진(消盡)해야 한다.
타오르고 싶은 연탄의 본능, 나는 이를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반대는 아마도 냉소주의가 될 것이다. 문득 거울을 보고 싶고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
지난 2-30대, 나는 하루하루 출근 때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의 심정으로 다짐하고 또 뛰었다. 참 부지런히도 일했고 가정과 자녀 일은 전부 아내에게 맡겨 둘 정도였다.
빨간 버슬 타고 무룡산 넘어 온 촌놈이 전국적으로 이름께나 알리고 사내에서나 업계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면 이 길 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열정을 불살랐다.
지나간 청춘을 반추해보면 그 밑바닥에 있는 저력은 바로 열정이었다.
열정!- 아직도 우리는 식지않는 열정을 간직하고 있어야한다.
사보를 보다가 우연히 서울엠비시 정길화 특보의 글이 눈에 띄어 옮겨 적는다. 찬찬히 읽어보고 음미하시길....(정길화특보는 PD수첩 초기 진행자였고 이제는 말한다 시리즈 팀장을 역임한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한국의 간판 PD임)
------열정에 관하여-정길화(MBC 사장 특보)
<연탄재>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안도현의 작품이다.
발로 차지는 말아라
네가 언제 남을 위해 그렇게 타오른 적이 있었더냐
아마도 대부분 한 번쯤은 이 시를 접했을 것이라 믿는다. 짧고 간명하여 언어적 조탁의 극치를 이루는 시. 마치 일본 문학의 하이구(俳句)를 연상하게 하는, 자연과 인생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포착한 이 시구는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애송된다. 그런데 이 시의 원래 제목과 내용은 이와는 다르다. 구전되는 가운데 혹은 인터넷에서 함부로 퍼다 나르는 과정에서 필경 착오가 발생했을 것이다. 본시는 <너에게 묻는다>가 제목이다. 시구(詩句)도 조금은 다르다. 이는 안도현 시인에게 직접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본(異本)이든 정본(正本)이든 시인의 에스프리는 훼손되지 않는다. 안도현은 함부로 버려지는 연탄재를 보며 그것이 불타올랐던 때의 본질을 통찰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는 절구(絶句)를 안겨주는 것이다. 정말 내가 언제 남을 위해 뜨겁게 불타본 적이 있다고, 그래서 이제는 재만 남도록 치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연탄재를 발로 찰 수 있을 것인가. 못할 일이다. 부끄러워서라도 차마 못할 일이다....
시인의 영감은 연탄재를 보며 연탄을 추상(抽象)한다. 골목길 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연탄재를 무심히 발로 차는 세인의 인심을 보며 그는 연탄의 화염(火焰)을 기억한다. 그리고 진실로 누군가를 위해 불타올랐던 자만이 들려주는 생생한 육성을 대신 말하는 것이다. 그는 불붙어 있을 때 연탄만도 못한 세인들이 감히 연탄재를 차는 것에 경종을 울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연탄의 불은 그의 정열이다. 호올로 불타올라, 그는 한 세대 전의 한국인들에게 광열(光熱)을 제공했다. 비록 간헐적으로 일산화탄소로 인한 중독 사고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용자의 부주의일 뿐,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들어가는 자리를 탐하지 않았고 자신의 조건과 처지를 따지지 않았다. 불문이 열리면 안간힘으로 불구멍을 맞추어 불기를 피워 올렸다. 최선을 다해 열을 지피면서 발열과 취사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재로 남았다.
안도현은 <연탄 한 장>이라는 다른 시에서 이르기를,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것이 두려워 /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했네
라고 말하며 그의 ‘본심’을 토로하고 있다. 그가 <너에게 묻는다>에서 왜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재가 되는 것이 두려워 한 번도 타오르지 못한 인생. 그것은 그저 허접한 석탄 뭉치일 뿐이다. 연탄이 타오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 때문이다. 연탄재는 비로소 시인을 넘어 우리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지만, 타올라야 할 때 타오르지 못한 인생은 굳어버린 채 세월의 더께가 된다. 타인을 탓하고, 남을 허물하기보다 찬연히 타올라 소진(消盡)해야 한다.
타오르고 싶은 연탄의 본능, 나는 이를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반대는 아마도 냉소주의가 될 것이다. 문득 거울을 보고 싶고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