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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던 날

김종렬(09) 작성일 06-12-12 15:11 8,205회 2건

본문

초겨울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서둘러 도착한 토요일 오후의 시골집.
시골집이 제법 소란스럽다. 사람 사는 집 같다.
여느 이웃집에 비해 우리집은 늘 시끌벅적한 편이지만 오늘은 좀 유별나 보인다.
모처럼 재수씨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조카놈들까지 합세해 무와 배추를 뽑고 나르고 가르고....
집안의 크고 작은 통이며 다라이들이 총 동원되고, 수도꼭지는 쉼 틈이 없다.

아직 소금 치는 일은 어머니 몫이다. 아내인들 그 일을 이십 년 가까이 배우고 손수 해왔으니 하지야 못하겠느냐만, 적어도 시골집에서는 어머니 손맛이 제격이라며 일부러 미룬다.
내심 어머니도 즐거운 모양이다.

올해는 배추가 별 시원찮다. 지난 봄부터 오랜 관절염을 이기고 기적처럼 걸음을 걷게 된 아버지가 물을 너무 자주 주어 뒤늦게 병이 든 까닭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비록 덜 알차긴 하지만 이보다 더 귀하고 맛있는 배추가 어디 있으랴. 오늘처럼 힘이 잔뜩 들어간 아버지의 어깨를 보기가 정말 얼마만이었던가.  그래서일까.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추는 못 생긴 것이 더 맛 있다' 맞장구를 친다.

어느 새 가마솥 아궁이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잘 익은 숯불 위로 석쇠가 얹히고, 이어 삽겹살이며 돼지갈비가 지글지글 익기 시작한다. 그제사 애꾸눈(누가 버려 키운 개) 멍멍이도 꼬리를 흔들며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고, 이웃집 고양이도 조심 걸음으로 기웃거리고....금방 막걸리며 쇠주 몇 병이 쓰러진다.

물끄러미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입가에 꽃물 같은 미소가 번진다. 어머니의 이마도 모처럼 팽팽하다. 그러는 사이 한참 안 보이던 아버지가 누런 호박 몇 개를 꺼내 오신다.
'이거 너거들 푹 고아서 묵거라. 특히 여자들한테 좋단다. 손발 저리고 붓는 데는 직빵이다' 며
세 며느리에게 하나씩 안겨준다. 모두들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이 박꽃처럼 희다.

이래 저래 해가 늬엇늬엇 기울고, 고향집 문을 나선다.
자꾸 불안이 엄습한다.
언제나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오늘처럼 아버지의 배추밭을 걸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의 그 누런 호박을 먹을 수 있으며 참 좋으련만...
차가 고향마실 모룽지로 사라질 때까지, 저 멀리서 손 흔드시는 뿌연 아버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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