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고 풍수학회 사월 간산기 - 1-
박춘호(01)
작성일
07-05-01 10:35 9,1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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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학성고 풍수지리학회(학풍회)는 매달 한번씩 문화유산 답사를 간다
학풍회에서는 문화유산과 민속자료 문화재등을 풍수로서 조명하고 논증하기 위함이다
풍수를 모르고는 우리 전통 문화와 문화재 및 민속자료를 바로 이해할수 없다
풍수를 모르고는 문화 답사를 간다해도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
코끼리가 기둥 같이 생겼다던가 귀만 만져보고 부채같이 생겼다고 하는것과 같다
예를 들어 소쇄원에 가서 이상한 담을 보고
풍수를 모르고는 이상한 담이 왜 그곳에 쳐저 있는지 도저히 알수 없기 때문이다
소쇄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 건축물과 문화재는 풍수를 모르고는 보아도 보았다고 말할수 없다
풍수를 배제한 우리 문화유산의 조명이란 말장난식의 미사려구 짜깁기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학풍회원들이 풍수를 공부 연구하는것은
혹세무민하는 무덤풍수나 미신같은 발복풍수를 응징하고
우리 문화를 좀더 완벽하게 풍수로 접근해 보고자 함에 있다
문화유산 풍수 현장이 우리 땅에는 적어도 이천여 년 간이나 이어져왔다
민학회나 박물관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문화재 답사나 문학기행을 가다보면
앵무새처럼 설명하는 교수나 해설가의 설명은 태반이 식상한 목수학 이론들이고
목수학 이론조차도 모르고 다니는 답사팀들도 많아서
답사는 뒷전이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끝내고 뒷풀이로 음주가무가 주전인
그래서 기독인들은 아예 그런 저속한 단체를 꺼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학풍회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동문들이 모여있다
교회 집사이면서도 동양학과 우리 문화에 심취한 학풍회장(위 사진에 없다)과
유림에서 한학을 전공한 토민 금석학 연구소장인 사무국장
수석과 산야초 연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청일당
(줄을 잘서야 하는대 맨 오른쪽 끝에라서 홈피 화면이 작은 관계로 안나옴 ^^*)
고건축을 연구하고 풍류에 따라갈자가 없는 불심 깊은 성지님
고대사학과 상고사를 연구하며 그방면에 해박한 정호당
이만 동문들에게 마음의 양식인 동문지 발행 편집 책임자를 맡고 있는 삼하당
자연과 울산을 사랑하는 울산사랑운동가 왕림헌
자연을 노래하는 남초는 신춘문예 당선 시인이며
상조회 대표며 현장풍수가 아다선 ,한문서당하면서 후배 양성에 조야당
현제로 우리회의 제일 막내 구엽동이 검찰 수사관인 장경남
그리고 개인 사정으로 못나와 위 사진에 보이지 않는 회원들 ........
특별회원으로 부산 울산 양산 등지에서 모인 여류 시인들 등등 ...
그들은 학성고 야간반이라고들 말하지만
그래서 학성고가 어떻게 생긴지 어디에 있는지 밤에만 가봐서 모른다기에
화창한 생기 복덕날을 잡아 주간에 모교 교정을 간산 시킨 적도 있었지 ㅎㅎㅎ
그래서 우리 학풍회의 답사는 간산이라고 부르며
한번 간산을 나갈때 마다 방대한 우리 민속과 문화재를 접하고
각방면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낄수 있다
간산을 마무리하고 뒷풀이에서 일류 명문고 출신답게 각자의 의견들로 열띤 토론을 한다
복스럽게 생긴 대형 거북이 한 마리가 산속 산소 앞 소나무 숲속에서 알을 품고 있다
사월달 간산을 여기 거북알의 지기를 받은 사일 서씨 고가부터 하기로 했다
사월달 간산을 여기 거북알의 지기를 받은 사일 서씨 고가부터 하기로 했다
고 서상연 시인의 집이며 현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인 서병수의원도 이곳 정기를 받고 태어 났다
1981년에는 제13대 문협울산지부장에 서상연, 부지부장 김헌경(현 울산 시인협회장)을 선임하여.
4월 5일 문협 울산지부 야유회(울주 범서 서상연 지부장 고택)는 중앙문단의 김동리, 손소희, 홍윤숙, 임성숙, 신자은, 박화목, 박상지 등의 문인들이 초청되기도한 울산 문협의 산실이다
울산에서 범서로 가다보면 입암리 선바위가 나온다
부산 등지에서 처음 와본 여성 특별회원들은
울산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줄 몰랐다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선바위에서 두동 쪽으로 망성다리를 지나 바로 좌회전하여 태화강 푸른 물줄기를 따라 2키로 정도 가면
서씨 집성촌인 사일 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서씨 고가가 나온다
달성 서씨 집성촌인 사일 마을 앞으로는 태화강이 유유히 흐러고
태화강 양안으로 기름진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언양-울산 간 국도와 고속도로 너머로는 문수산이 바라다 보인다.
마을 중간에 솟을대문을 한 고래등 같은 고가가 있는데
마을 중간에 솟을대문을 한 고래등 같은 고가가 있는데
2백여 년 전 서달원님이 이 마을로 이주해 와서 지은 것이다
원래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로 지어졌으나
몇 년 전 곳간채와 행랑채는 비가 새고 보수하기 힘들어 헐어버렸다.
뒷산이 낮고 지형이 평평해 전체적으로 옆으로 긴 가옥구조이다.
뒷산이 낮거나 지형이 평평하면 보통 가옥 구조도 옆으로 길게 한다
안채는 일반 서민들의 살림집을 확대한 것같이 일자형의 옆으로 긴 7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안채 제일 오른쪽 방인 멀방은 며느리방으로 사용하거나 딸 신행용방으로 사용했다.
몇 년전 중간 행랑채를 수리하면서 지붕꼭대기 기와를 몇 층 더 올리는 바람에
안채는 일반 서민들의 살림집을 확대한 것같이 일자형의 옆으로 긴 7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안채 제일 오른쪽 방인 멀방은 며느리방으로 사용하거나 딸 신행용방으로 사용했다.
몇 년전 중간 행랑채를 수리하면서 지붕꼭대기 기와를 몇 층 더 올리는 바람에
안채 전망이 가려지게 되어 갑갑함을 느끼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안채 뒤뜰 중간에 담을 쌓아 장독대를 부엌쪽이 아닌 반대쪽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이는 살림을 사는 종들이 함부로 된장이나 간장을 퍼가지 못하도록 하고,
장독 출입 때에 반드시 주인의 눈에 띄는 안마당을 거쳐 가도록 하였다.
마치 행랑채를 안방에서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던 것과 같다
마치 행랑채를 안방에서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던 것과 같다
현판이 있는 사랑채다
장조카 시집살이 갈때 상각으로 따라가서
이방에서 큰 상을 받고 고 서상연 시인과 서상용 사돈과 처음 만나서 인사 나눈 곳이다
사랑방 천장이 기름먹인 벽지로 발라져 있는것이 특별하다
조카는 안동가고 없었지만
미리 간다고 연락해 놓아서 대문은 열려 있었다
사랑채 마루앞에 굴뚝을 옹기로 만들어 놓은것이 일반집 굴뚝 위치와 비교가 된다
군불을 때면 연기가 사랑채 앞으로 나와 집을 꺼실지나 않았을까
대문이 3개있다
처음 큰 대문을 들어서면 큰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따로 나온다
대문으로 철저하게 안채와 사랑채를 분리시켜 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이 따로 있고 곧바로 가면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마당도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따로 있어 남녀 간 생활공간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
마당도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따로 있어 남녀 간 생활공간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
사랑채다
60년대 울산 문협이 태동된 곳이라고 고 서상연 시인에게서 들었다
국내 중견 시인묵객들이 울산걸음 할때면 묵고 갔던 곳이라고 했다
귀신을 쫒는다는 귀전목이다
귀신이 무서워 도망간다는 화살나무도 정원에서 화사한 주일 봄날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랑채 마루위에 앉아서 앞을 보면 담밖에 주작 역활을 하는 문수산이 날개를 활짝펴고
우아하게 춤추는 모습이 보인다
서씨 고가를 향해 거대한 주작 한 마리가 춤 추고 있다
(여기에는 위의 단체 사진에서 빠진 청일당 남초 조야당 그리고 저의 모습이 보이네요 ㅎㅎㅎ)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단정하게 지었는데
방 2칸과 마루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분합문 형식이어서 4칸을 하나로 틀 수 있다.
앞뒤로 모두 툇마루가 있어 앞쪽은 경치를 즐기는 풍류용으로, 뒤쪽은 광으로 사용한 것 같다.
지붕틀은 재질이 매우 우수하고 정교하게 천장을 만들어 가리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
앞뒤로 모두 툇마루가 있어 앞쪽은 경치를 즐기는 풍류용으로, 뒤쪽은 광으로 사용한 것 같다.
지붕틀은 재질이 매우 우수하고 정교하게 천장을 만들어 가리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
지붕틀은 정교하게 만들기 어려워 천장으로 가려 놓은것이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면 매우 이채롭다.
또 사랑체 방 천장은 기름을 먹인 종이 반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국에서도 보기드물다.
사랑채 제일 왼쪽에는 빈소방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대부 집에서 사당을 따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또 사랑체 방 천장은 기름을 먹인 종이 반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국에서도 보기드물다.
사랑채 제일 왼쪽에는 빈소방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대부 집에서 사당을 따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당이 있다가 없어진 것 같다.
툇마루에 앉으면 앞의 넓은 들과 문수산이 멀리 보이고
툇마루에 앉으면 앞의 넓은 들과 문수산이 멀리 보이고
뜰에는 매화 목련 등을 심어 은은히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어느해 내가 조카 시집살이 보내려 상각으로 따라갔을때 매화꽃봉오리가 탐스럽게 맺혀있었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채는 보이지 않고 사랑채만 보인다
아직도 담은 두껍고 견고하게 잘 보전되어 있었다
검 붉은 모란이 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모란이 필때 까지 나는 아직 봄을 기다린다 했는데
모란이 만개했으니 나의 봄도 한방중인가 보다
집밖 대문 앞에는 사각형 연못이 있다
연못 한 복판에 둥근 섬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도교적인 색채를 농후하게 보여 준다.
연못을 집밖에 만들어 색다른 공간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다른 고가와는 상이한 점이다
풍수상 집안에 우물을 파면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하여 집 밖에 연못을 만들었다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상각 갔던날 담 밖 잔디에 불이났다
신부가 시집오는 날 대문밖에 서있게 하고 집단에 불을 붙여 밟고 들어오게 한다
밟고 들어온후에 바람이 불어 대문밖 잔디에 언제 붙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불이 붙었다
낮이였는데도 도깨비 바람이 불어 불이 났다고 기억된다
재산을 불꽃처럼 일어키는 도깨비 불
잔치를 하니 도깨비들도 신이 났던 모양이다
결혼하고 나서 불이나면 재산이 불꽃같이 일어 난다고 사돈들이 좋아라했던 기억들이 새로웠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대문이 서쪽으로 나 있는 것도 특징이다.
20세기 초에 나온 풍수서 민택삼요(民宅三要)에
안방, 대문, 부엌의 방향과 위치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고 매우 중요한 것으로
집 주인의 사주팔자를 봐서 그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모란에서 고 서상연 시인의 시한편이 떠올랐다
고 서상연 시인은 울산이 생기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산 문인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그만큼 울산 문협 발전에 크나큰 공적을 남기셨다
대문옆 벽에 써놓은 기호들이다
바를 正 자를 몇개씩 써놓았는데 완성된자도 있고 미완성된 자도 있다
무슨 암호 같은데
저걸 풀어야 사일 서씨 종가댁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비밀이 풀리리라
지금 살고 있는 서상연 시인의 큰 아들은 학성고 17회 동문이며 서만교 후배다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은 두께가 두껍고 견고해 아직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담 위에는 이끼가 낀 기와가 그대로 얹혀 있다.
또 대문이 서쪽으로 나 있는 것도 특징이다.
명당간산에서 수십만 볼트 지기를 받은 학풍회원들이
뒷풀이 하기전에 족구를 붙었다
어둠이 깔리고 소쩍새가 날라와서 솥쩍다고 울때 까지 족구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