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원정대...
이채욱(07)
작성일
07-06-09 11:10 9,510회
6건
본문
에베레스트에 백발 휘날리며…
60~75세 ‘실버 원정대’ 24일 네팔로
넉달 테스트 거쳐 뽑힌 인생의 황혼기 8명 남이 못한 일 이루려…
25㎏ 배낭 등에 메고 하루 12시간 강훈련… 전현석기자 winwin@chosun.com
입력 : 2007.03.07 00:09 / 수정 : 2007.03.07 03:00
넉달 테스트 거쳐 뽑힌 인생의 황혼기 8명 남이 못한 일 이루려…
25㎏ 배낭 등에 메고 하루 12시간 강훈련… 전현석기자 winwin@chosun.com
입력 : 2007.03.07 00:09 / 수정 : 2007.03.07 03:00
- 가랑비가 내리는 4일 오후 북한산 백운대.
남자 8명이 경사가 45도가 넘는 미끄러운 암벽에서 로프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20㎏이 넘는 배낭까지 메고 한 시간 가량 오르내리기를 반복한 뒤 훈련을 끝내고 안전모를 벗었다. 성성한 백발과 주름살 팬 얼굴에서 모락모락 하얀 김이 솟았다.
퇴직자 등 60~75세 노인 8명으로 구성된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가 탄생했다. 강철 체력과 전문 기술로 무장된 젊은 산악인들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세계 최고봉 정복을 이처럼 노인들로만 구성된 원정대가 도전한다. 할아버지 원정대는 한국에선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일이다. 이들은 오는 24일 네팔로 간다.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까지 3개월간의 대장정에 오른다. 인생 황혼기에 ‘남이 해보지 못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을 떠나는 셈이다.
◆목숨 건 도전
올해는 고(故) 고상돈씨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 30주년이 되는 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일보와 월간 산, 한국산악회가 공동 주최로 60세 이상 산악인을 대상으로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를 모집했다. 전국에서 53명이 지원했고, 4개월 동안의 체력 테스트 등을 거쳐 8명이 최종 선발됐다. 최홍건 한국산악회장(한국산업기술대 총장)이 실버 원정대 단장을 맡아 총지휘를 하고 있다.
이날 백운대 훈련을 마치고 이장우(63·경찰청 경감 퇴임)씨가 “백두대간 9개 정맥을 단독 종주했다”고 자랑하자, 다른 대원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킬리만자로, 엘부르즈, 안나푸르나, 슐탄봉 등 화려한 등반 경력을 쏟아냈다. 그런 이들에게도 이번 훈련은 혹독했다. 무게 25㎏ 배낭을 메고 하루 12시간씩 나흘을 행군하기도 했고, 네팔에서 해발 6000m 현지 적응훈련까지 마쳤다. 이들은 새해 첫날도 눈이 2m나 쌓인 설악산에서 맞았다.
죽을 고비도 있었다. 지난달 3일 한라산에서 2~3m 쌓인 눈을 헤치고 전진하는 훈련을 할 때 눈사태가 일어났다. 훈련 지원단까지 합쳐 16명 중 10명이 눈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선두에 섰던 이충호(64·서울증권 지점장 퇴임)씨는 물구나무 상태로 1m 눈 속에서 15분 동안 갇히기도 했다. 모두들 “한날 한시에 죽다 살아난 셈”이라며 “이제 우리 생일은 2007년 2월 3일로 똑같아졌다”고 했다.
◆피할 수 없는 고산병… 일부 가족들 반대
이렇게 맞춤 훈련을 해도 3개월간 계속되는 에베레스트 등정은 환갑을 넘긴 이들에게 목숨을 건 도전이다. 에베레스트 정복을 목표로 한 60세 이상 대원이 8명이나 포함된 원정대는 세계적으로도 구경하기 힘든 사례다.
- ▲에베레스트 정복을 위해 오는 24일 출발하는 실버 원정대가 3일 북한산 백운대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광현(67), 김성봉(66), 박승언(66), 이남진(69), 이장우(63), 차재현(75), 김상홍(60), 이충호(64)씨. /김보배 객원기자 iperry@chosun.com
-
6500m 캠프에서 이들을 지원해 줄 실버 원정대 김종호(52) 부단장은 “7000m 이상부터 산소통에 의지하기로 했지만 설사, 구토를 일으키는 고산병은 피할 수 없다”며 “전문 산악인도 최소 12시간 이상 걸리는 마지막 마(魔)의 900m가 등정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런 위험을 잘 아는 가족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부대장이자 ‘막내’인 김상홍(60·계명대 산악부 지도교수)씨의 부인은 아직까지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2004년 김씨가 단장 자격으로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끌었을 때 그의 제자가 숨진 아픔을 부인도 잊을 수 없다.
나이가 가장 많은 ‘큰형’ 차재현(75·개인사업)씨는 지난 1989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도전했다가 고산병을 겪고 난 후 몇 년 동안 실어증(失語症)을 앓기도 했다. 가족 반대도 제일 심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흔적이 아니기를…”
가족이 왜 반대하는지도, 8명이 모두 함께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것도 그들은 잘 안다.
해군 UDT(수중 파괴반) 대령으로 전역해 1996년 수영팀을 이끌고 경주 앞바다에서 독도까지 릴레이 수영에 성공했고 지난해 킬리만자로까지 오른 조광현(67)씨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겠지. 그래도 우리들 중 한 명은 꼭 정상을 밟을 거야.”
원정대 등반대장을 맡은 김성봉(66·한국산악회 부회장)씨는 지난달 6일 부인이 혀에 암이 생겨 혀 절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훈련을 포기했던 김씨를 일으켜 세운 건 말 못하는 부인이 쓴 메모였다. ‘우리 같은 노인도 하면 된다는 걸 보여줘요.’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이남진(69)씨는 가족에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이 등반이 내 인생의 마지막 흔적이 될 수 있지만, 나는 최초의 흔적이 될 거라고 믿는다. 여보,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
◆꿈은 이루어진다
8명이 훈련을 하나하나 이겨낼 때마다 가족들의 반대는 점점 뜨거운 응원으로 바뀌었다. 실버원정대 홈페이지(www.silverexp.com)에는 가족의 응원 메시지가 줄을 잇는다. “할아버지 최고~” “아빠의 도전이 저에게 큰 힘이 돼요” “아버님, 사위입니다. 정상 도전의 기회를 거머쥐신 아버님 존경합니다”….
이들은 훈련을 마치고 오후 늦게 북한산을 내려왔다. 눈이 다 녹아 낙엽이 훤히 드러난 산길을 걸으며 박승언(66·인천지방공무원 퇴임)씨가 말했다. “8명 모두 한국에 무사히 돌아와야지. 그때는 낙엽 대신 새파란 풀을 밟으면서 다시 산에 오르자고.” -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