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찌(町)라는 일본 말은 거리를 뜻하는 단어인듯 하다.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는 '울산마찌'란 거리명이 있다.
마찌는 예전에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온 '혼마찌'(本町)니 '종로마찌'니 해서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귀에 익은 단어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엠비시 사거리' 하듯이 일종의 스트리트 네임(개념)이라고나 할까?
현재 남은 구마모토의 '울산마찌'는 한적한 전차 정거장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데 주위에는 '주유소, 임대 아파트, 우체국, 우동집, 꽃집 그리고 YMCA'가 위치한 동네였다. 이 동네를 차례차례 들러보았다.
이 단어에 대해 '당신들은 뭔가 아는가?' '역사성이 있는가?' '울산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등의 질문을 계속해 나가며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났다.
근데 한나절 내내 돌아다니며 만나는 이 모두에게 물었지만 불행히도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진짜 향토사에 관심있는 노인들을 찾거나 사료를 통한 역사성을 추론할 수 밖에 없다.
가토오기요마사가 울산에서 패전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몰래 그믐밤에 귀국했다지 아마? (패전에 대한 수치심으로 인해)
고향 구마모토에 돌아가서 대대적으로 벌인 작업이 <토목. 수리. 치산치수>에 <구마모토 성 축성> 그리고 기와. 도예, 엿만들기, 된장 만들기, 제철등등의 작업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구마모토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의 신으로 모시고 있다.(구마모토에는 가토오를 신으로 모신 신사가 부지기수다, 동상도 있고 조선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그림은 상점마다 걸려있을 정도다-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가토는 절치부심한다-사나이라면 귀감이 될 만한게...일본말로 "요오시"하면서 <울산>이란 단어를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않았다 한다.
<울산>이란 말만 들어도 자다가 깨고 이를 악물고 모든 시설에 <울산에서 얻은 교훈>을 새기고 자기의 심복조차 울산에서 데려간 포로를 설득해 심어두고 또 자기(성주)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중의 집사도 울산 포로인 김관이란 자를 심어 활용했다.
이 '울산마찌'도 <가토오의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증거>이자 그의 복수심, 의지의 물증일 수 있다.
거대한 구마토 성아래 구석진 마을, 한 거리에 울산에서 데려간 각종 기술자들의 포로들을 모아 집단 거주지를 조성해 모두 한곳에 살게 했다?-이게 바로 울산마찌다.
그래서 자기가 말타고 이 마을을 지나 다닐 때마다 '요오시' 하며 이를 악물며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되뇌었다?
낮에는 그들을 활용해 축성하는데 일 시키고.....시간은 흘러 흘러 성아래 울산마찌는 그냥 한적한 시내전차 정류장 이름으로만 남았고 그마저 희미해져 신마찌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 주변을 뒤지며 한나절 동안 울산마찌에 살던 사람들의 후예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 후손들도 400년동안 살며 울산출신(포로신분이었으니)이란 사실을 모두 숨겼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찾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100여년 이어오고 있는 간장공장이 있는데 그 공장에 울산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고 <울산연구회> <울산사랑 모임>등이 있다고 한다.
희미한 역사의 그림자여!
그 오리지널을 찾을 수 있다면.................
■ 울산마찌 (蔚山町)
구마모토 성 아래에 위치한 시내전철및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 원래는 임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울산 출신의 기술자들(수공업자, 돌쌓기 기술자, 도공, 직물과 칼 제작자등)의 집단 거주지였으나 1965년 이후 신마찌(新町)로 불리다 지금은 정거장 이름으로만 사용.
가또오 기요마사가 울산성 전투에서 당한 뼈아픈 실패를 잊지 않기 위해(와신상담) 울산 마찌를 조성했다는 기록도 전함(현지 향토사연구자).
일본인들은 우루산 또는 오루산이라고 발음한다. 이같은 발음의 울산 표음은 후쿠오카 지방에도 있는데 박제상 관련 설화나 읍지 기록이 후쿠오카에도 일부 남아 박제상의 대마도 순국설을 뒤집을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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