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정조라 하니 생각나 퍼 올립니다
본문
퇴계선생(48세)은 단양군수로 재임시에 관기 두향(18세)을 만나
9개월이란 짧은 세월 동안 운우의 지정에 빠졌다가 이별하는 정표로
하얀속옷 치마폭에 이별의 시 한수를 남겼으며, 두향은 그 정표로
매화분을 선물하였고 따라서 튀계선생은 생전에 매화를 사랑하며
읊은 시가 약 70여 수가 남았다고 합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1
보섭중정월진인 (步섭中庭月진人)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향만의건영만신 (香滿衣巾影滿身)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2
독의산창야색한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두향(杜香).
관비였지만 총명하고 학문과 예술의 깊이가 두터웠다고 합니다.
동방 최고의 선비로 칭송받던 퇴계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두향은 조선시대 단양 태생의 관기(官妓)로 시와 거문고에 능해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해 오자
그를 일편단심 사모했으나, 퇴계의 단양 시절은 열달만에 끝나고 풍기군수로 다시 전근을 가게 됩니다.
그것은 고을 수령은 임기가 보통 5년인데,
그의 넷째 형 온계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 까닭이었습니다.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 하여 퇴계는 고개 너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되는거지요.
이를 '상피제도'라 한답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급작스런 이별은 두향에겐 큰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단양을 떠날 때 퇴계의 봇짐 속엔 수석 두 개와 두향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매화 화분 하나 뿐이었다고 하네요.
그는 이 매화를 평생 애지중지했다고 하지요.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에 내려갔을 때도 이 매화와 늘 함께 했다고 합니다.
지금 도산 서원에 있는 매화도 그때 그 나무의 후손이라고 한다지요.
그는 도산서원 입구 한켠에 절우사(節友社)란 정원을 꾸며놓고
거기에 솔, 대, 국화, 연(蓮)과 함께 매화를 심고, 자신을 포함해 절친한 '여섯 벗'이라 하며 즐겼다고하지요.
퇴계 44세 때 매화를 읊은 작품.
"막고산(?姑山) 신선님이 눈 내린 마을에 와/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려//
바람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
옥빛이 천연스레 속세를 뛰어났네//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여들기 싫어하고 /
천년이라 고산(孤山)에 한 번 웃음 웃네."
죽기 직전 그의 유언은 이 매화꽃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지요.
선조 3년(1570년) 12월 8일 아침. 시봉하는 사람에게 분매에 물을 주라고 명한 뒤
저녁 5시에 편안하게 세상을 뜨셨다고 합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 기생을 면했다고 전해온답니다.
두향은 구담봉 앞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고,
그후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임종했다는 설과,
나중에 퇴계가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 전하는데, 이렇게 유언했다고 하는군요.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가 거북바위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선생을 모시고 자주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두향의 무덤. -단양으로 들어서는 동쪽 문. 옥순봉으로 가는 물길을 따라 가다 건너편.
그녀는 유언으로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한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한답니다.
그후 이백년이 지난 어느 날 이광려라는 문장가는 다음과 같이 시 한 수 읊었답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는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어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그리하여 지금도 잡초가 우거진 두향의 무덤이 단양에 남아있게 됩니다.
1976년 소설가 (故)정비석은 그곳을 직접 찾아 충주댐이 완성되면 두향의 무덤이 수몰돼니
단양군수에게 이장을 청하여 지금의 안전지대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소설가 정비석(1911-1991) 씨가 쓴 명기 열전에는 두향이 죽령을 넘어 풍기로 찾아가
먼발치에서 퇴계를 바라보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지요.
단 10개월의 만남만으로 후세 사람들이 알만한 그리움을 앓고 갔으니, 두향이 퇴계를 찾아 죽령만 넘었겠는가!
그 마음은 구름도 넘고 달도 넘어 퇴계를 찾고 한숨은 밤마다 울장을 넘었을 것이지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이제나 저제나 사람의 피와 혼을 말리는가 봅니다.
그녀는 유언으로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한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한답니다.
그후 이백년이 지난 어느 날 이광려라는 문장가는 다음과 같이 시 한 수 읊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