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풍 2008년 1월 간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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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제 마을의 예담이랍니다. 예담이란 우리의 옛담이란 말로 전통적으로 어깨를 오르지 않는 담장이 우리의 담장입니다. 그러나 강을 끼고 있어 흙담의 아니고 돌담의 소재로 집 단장을 꾸렸습니다. 천하에 못쓰는 것이 셋 있는데, 그 하나가 돌담 배 부른것, 처녀 아이 배는것, 또 하나가 ??? 인데 한번 알아 맞춰 보세욤^^ 고즈넉한 흙담에 박힌 돌들이 켜켜이 쌓아 정감가는 우리네 옛 담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행은 예와 오늘을 찾는 큰 즐거운 것입니다.
이것이 정면 3칸 대문인 솟을 대문입니다. 벼슬을 한집안의 상징처럼 행해 온 전통 가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정문은 홍살문에 벽사를 막으며, 정면의 높은 문은 양반들이 초헌을 타고 출입을 할때 갓이 닿음을 방지하기 조금 높게 한 대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명 솟을 대문이라고 합니다. ^^
尼泗齋는 조선전기 討捕使의 종사관으로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松月堂 朴好元의(1527~ ) 재실이다. 멀리 니구산 아래 泗水川을 휘돌아 가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본디 尼泗란? 중국 山東省의 鄒땅을 말하며 魯나라로 흐르는 泗水와 공자의 고향을 돌아드는 천을 말한다. 尼丘山의 공자가 태어난 산을 말하니, 니사재는 공자의 고향 마을을 본 딴 지명이다
梅飄香雪柳金絲 正是王孫膓斷時 燕子光陰來鼎鼎 杏花消息老垂垂 田園蕪穢綠資簿 世路蹉跪坐數奇 玉笛一聲山月上 傷春億別恨榮思
버들은 늘어지고 매화향기 날리니/ 이때 바로 공손들의 애를 끊이오/ 세월을 빨라 제비는 새로 나들고/ 꽃 피는봄 소식도 가까워 지네/ 밭 갈이 게으름에 살림 궁하고/ 세상길 험난하여 뜻 못 이루네/ 달 밝은 밤 피리소리 들려오는데/ 봄 시름 이별한 시름 마음 설레오. ^^ 이 정도는 되어야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不欺自心" 곧 "자기의 마음을 거짓되게 하지 말라"는 말인데 속뜻은 거짓되고 사악됨이 없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진정한 본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寺門의 후학들을 위해 써둔 "麻三斤" 이란? 화두의 글이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麻三斤"이라 풀어쓰면 "먹는 마 세근" 말인데 마 세근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지 아직도 뇌리에 남아 돕니다. 아마 마 세근으로 평생 정진하면서 입에 풀칠하듯 욕심없이 살라는 말뜻도 하온데@@ 회원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댓글이라도 달아 주세요^^
해가 늬엿늬엿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단속사지 서탑에서 한컷을 했습니다. 이 사찰은 8~9세기에 지어진 절로써 탑의 구조를 보면 대충 그 시대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塔身이 (집의 처마) 형식에 비견이 있으면 신라 후기로 봅니다.
두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았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 돌로 각 면에 1석씩 4석으로 구성하고 갑석은 8석으로 덮였다. 상층기단은 중석을 각 면 1석씩으로 짜고 갑석 2매는 판석으로 덮였다. 탱주는 하층기단이 2주 상층기단이 1주이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석씩이고 옥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고 옥개석과 밑의 받침은 각 층 5단씩이다. 상륜부는 서탑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동탑에는 노반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이 건립되었던 단속사는 신라의 고승 신행선사가 주석하던 곳으로 동구 암석에는 한각자의 크기의 30여 센치미터인 “廣濟巖門”과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다. 대자가 있고 四地에서 수백구의 나한상이 발견된 일이 있어 그 寺格이 짐작되며 산간유곡에 위치한 곳에 이만한 우수작이 건립되었음이 주목된다. 1967년 수리할 때 초층 옥신석에 원형 사리공이 있었으나 장엄구는 없었다고 전합니다. 절의 규모를봐서는 그리 큰 사찰은 아닌듯합니다만 당간지주가 절아래 200여 밑에 있는것 보면 그래도 꾀나 큰 절로 보입니다.
이곳 政堂梅는 通亭公 淮伯 선생과 通溪公 淮仲 선생의 沙月里 오룡골에서 출생하여 지리산 자락 斷俗寺에서 수학할 때 손수 심은 매화 나무랍니다. 수령이 줄잡아 650여년이라 뇌쇠했지만 그래도 풍상 겪은 나무들같이 새로운 정기를 다시 토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원정공 河楫이 심은 원정매, 그리고 南冥 曺植 선생께서 심은 남명매와 그리고 이곳 통정매가 산청 고을을 대표하는 三梅라고 불리워진답니다.
斷俗寺址에서 차를 타고 하산할 쯤에 차안에서 회장님이 당간이 저거란다 해서 차를 급히 세워 한컷 얻었습니다. 당간 역시 신라 후기의 것으로 석물이 세련되고, 당간을 버팀하는 지주의 구멍도 세구녕이었던 것을 보면 다른 사찰들과 년대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幢竿은 幢을 게양하기 위한 竿을 지지하던 石柱 기둥이다.
남명의 묘소는 멀리 지리산 천황봉에서 내리 달린 래룡이 머물어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형국이며, 묘소는 회룡고조형에 잠두혈이라 학풍 회장님은 설명한다. 옥녀가 비단을 짤 수 있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아주기 때문인 것이고, 길이 현이고 실이니 남명학이 점점 각광을 받고 있는 징조이니, 잠두나 옥녀는나 비단의 완벽한 형국이 아니겠는가?
이 사진은 심안으로가 아니라 자세히 보면 해저문 호숫가에 물오리 두마리가 다정히 유희하는 부부애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이를 끝으로 귀행길에 접어들었고 답사 뒷풀이는 서창 덕계에서 한바탕 술로 선후배가 어울어지는 날밤을 세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