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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풍회 2008년 1월 간산기^^

이수우(06) 작성일 08-01-30 14:49 8,957회 3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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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목화 시배지다. 바로 우리나라가 인정하는  최초의 도선생이랍니다. 비의 내용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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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제 마을의 예담이랍니다. 예담이란 우리의 옛담이란 말로 전통적으로 어깨를 오르지 않는 담장이 우리의 담장입니다. 그러나 강을 끼고 있어 흙담의 아니고 돌담의 소재로 집 단장을 꾸렸습니다. 천하에 못쓰는 것이 셋 있는데, 그 하나가 돌담 배 부른것, 처녀 아이 배는것, 또 하나가 ??? 인데 한번 알아 맞춰 보세욤^^ 고즈넉한 흙담에 박힌 돌들이 켜켜이 쌓아 정감가는 우리네 옛 담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행은 예와 오늘을 찾는 큰 즐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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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정면 3칸 대문인 솟을 대문입니다. 벼슬을 한집안의 상징처럼 행해 온 전통 가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정문은 홍살문에 벽사를 막으며,  정면의 높은 문은 양반들이 초헌을 타고 출입을 할때 갓이 닿음을 방지하기 조금 높게 한 대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명 솟을 대문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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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사재에서 한컷을 했습니다. 배산임수를 바라다 본 니사재는 정말 운치있는 재실이었습니다. 아늑한 산아래 엄마 품같이 안아든 정경이 너무 좋았습니다. 따스한 뜨락에 봄기운도 일고, 벌써 매홧가지에는 봉긋한 가슴을 푸풀어 있었고, 봄의 전령인 목련도 뽀롯이 입을 내 밀고 있었습니다.  
 

  尼泗齋는 조선전기 討捕使의 종사관으로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松月堂 朴好元의(1527~ ) 재실이다. 멀리 니구산 아래 泗水川을 휘돌아 가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본디 尼泗란? 중국 山東省의 鄒땅을 말하며 魯나라로 흐르는 泗水와 공자의 고향을 돌아드는 천을 말한다. 尼丘山의 공자가 태어난 산을 말하니, 니사재는 공자의 고향 마을을 본 딴 지명이다

 
  아늑한 재실에 담소를 나누다  재실 뒷켠을 살피니 단아한 선비의 정신을 볼 수있는 빗바랜 편액에 이렇게 적혀 있다 .

梅飄香雪柳金絲 正是王孫膓斷時 燕子光陰來鼎鼎 杏花消息老垂垂 田園蕪穢綠資簿 世路蹉跪坐數奇 玉笛一聲山月上 傷春億別恨榮思


버들은 늘어지고 매화향기 날리니/ 이때 바로 공손들의 애를 끊이오/ 세월을 빨라 제비는 새로 나들고/  꽃 피는봄 소식도 가까워 지네/ 밭 갈이 게으름에 살림 궁하고/  세상길 험난하여 뜻 못 이루네/ 달 밝은 밤 피리소리 들려오는데/ 봄 시름 이별한 시름 마음 설레오. ^^  이 정도는 되어야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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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智異山下 劫外寺에 들렀습니다. 겁외사에는 성철 스님의 전신을 모신 곳인데 무슨 이유로 경내를 지나는 고속도로가 뚫려 잇어 정말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늘에 넘치는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꽃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쎄/  그 누가 잠간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 가노라.  (彌天大業紅爐雪 跨海雄基赫日露 誰人甘死片時夢 超然獨步萬古眞) 라는 대선사의 出家詩가 눈에 선하게 아려 옵니다.
 
아래는 해동 원효의 선맥을 잇는 대선사의 悟道頌은 실어 본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산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달은빛을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據然一笑回首立 淸山依舊自雲中 )
 
말없는 산사에  차한잔을 떠 올리며  덤하여 열반송도 곁들여 실어 본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레나 되는지라/ 둥근한수레바퀴 붉음을 내 뿜으며 푸른산에걸이도다. (生平欺狂男女群彌天罪業過須彌活陷阿鼻恨萬端一輪吐紅掛碧山)  이런 대 선사의 대접이 중생들의 모습인가  화가 나셨는지 미리 써둔  이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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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不欺自心"  곧 "자기의 마음을 거짓되게 하지 말라"는 말인데 속뜻은 거짓되고 사악됨이 없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진정한 본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寺門의 후학들을 위해 써둔 "麻三斤" 이란? 화두의 글이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麻三斤"이라 풀어쓰면 "먹는 마 세근" 말인데 마 세근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지 아직도 뇌리에 남아 돕니다. 아마 마 세근으로 평생 정진하면서 입에 풀칠하듯 욕심없이 살라는 말뜻도 하온데@@  회원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댓글이라도 달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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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성균관이 공교육기관이었다면 서원은 지방의 향교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사학 교육기관입니다. 이 글은 도산서원의 글씨와 꼭 같은 글씨로 당대 한석봉이 쓴 글씨로 보아 집니다. 한호는 중국 왕희지의 글씨를 본받은 글씨로 육중한 자형에다 강한 필치는 마치 글씨가 살아 있은 듯한 느낌을 주는 글씨입니다. 행여 안동 도산서원에 가시거든 꼭 이 편액글씨와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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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늬엿늬엿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단속사지 서탑에서 한컷을 했습니다. 이 사찰은 8~9세기에 지어진 절로써 탑의 구조를 보면 대충 그 시대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塔身이 (집의 처마) 형식에 비견이 있으면 신라 후기로 봅니다.
 

두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았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 돌로 각 면에 1석씩 4석으로 구성하고 갑석은 8석으로 덮였다. 상층기단은 중석을 각 면 1석씩으로 짜고 갑석 2매는 판석으로 덮였다. 탱주는 하층기단이 2주 상층기단이 1주이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석씩이고 옥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고 옥개석과 밑의 받침은 각 층 5단씩이다. 상륜부는 서탑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동탑에는 노반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이 건립되었던 단속사는 신라의 고승 신행선사가 주석하던 곳으로 동구 암석에는 한각자의 크기의 30여 센치미터인 廣濟巖門과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다. 대자가 있고 四地에서 수백구의 나한상이 발견된 일이 있어 그 寺格이 짐작되며 산간유곡에 위치한 곳에 이만한 우수작이 건립되었음이 주목된다. 1967년 수리할 때 초층 옥신석에 원형 사리공이 있었으나 장엄구는 없었다고 전합니다.   절의 규모를봐서는 그리 큰 사찰은 아닌듯합니다만  당간지주가 절아래 200여 밑에 있는것 보면 그래도 꾀나 큰 절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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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은 유수같아 푸르고 푸르던 가지와 뿌리는 달아나 앙상한 가지만이 오늘을 대변하고있는듯 했습니다. 이 매화나무는

이곳 政堂梅는 通亭公 淮伯 선생과 通溪公 淮仲 선생의 沙月里 오룡골에서 출생하여 지리산 자락 斷俗寺에서 수학할 때 손수 심은 매화 나무랍니다.  수령이 줄잡아 650여년이라 뇌쇠했지만 그래도 풍상 겪은 나무들같이 새로운 정기를 다시 토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원정공 河楫이 심은 원정매, 그리고 南冥 曺植 선생께서 심은 남명매와 그리고 이곳 통정매가 산청 고을을 대표하는 三梅라고 불리워진답니다.

 

 지금 후손은 다들 어디에 있는지 고결했던 나무의 수세와 기품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이렇게 넘 초라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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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斷俗寺址에서 차를 타고 하산할 쯤에 차안에서 회장님이 당간이 저거란다 해서 차를 급히 세워 한컷 얻었습니다. 당간 역시 신라 후기의 것으로 석물이 세련되고, 당간을 버팀하는 지주의 구멍도 세구녕이었던 것을 보면 다른 사찰들과 년대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幢竿은 幢을 게양하기 위한 竿을 지지하던 石柱 기둥이다.
 
  지금 남아있는 完型의 당간은  羅州 東門外石幢竿으로 보물 제 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단석사지 당간도 석주에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나 세월의 무상함에 돌이끼만 온몸으로 단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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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답사지는 해가 어둑어둑 했어야 남명의 재실에 도착했습니다. 남명은 曺植 字는 健中, 號는 南冥, 本貫은 昌寧이다. 父는 승문원 판교를 지낸 曺彦亨이고 母는 인천 이씨로 충순위를 지낸 李菊의 딸이다. 1501년 연산군 7년 6월 26일 경상도 三嘉縣 兎洞에서 출생 하였다.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다. 그 뒤 성리대전을 읽다가 원나라 許衡의 말에 감동을 받고 성리학에 전심 하였다. 중년에 처가가 있는 金海로 이주하여 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전력하였으며, 38세때 천거되어 獻陵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8년 삼가 兎洞에 雷龍亭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찾아드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1549년 전생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丹城 縣監등에 재수 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561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동에 들어가 산천제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 1572년 선조 5년 2월 8일에 卒 하였다. 조식은 反躬體驗과 持敬實行을 내세우며 이론적인 탐구보다는 실천적인 학풍을 수립하였고, 학문의 요체로 경이를 세웠다. 退溪와 함께 당대 상벽을 이룬 학자로 우똑한 정신세계를 수립한 면에서 후세에 대대로 숭상되었다. 문하에 鄭逑, 吳健, 金宇顒, 鄭仁弘, 河沆, 崔永慶 등 수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는데 문도들의 앞장을 섰다. 저술로는 14권 8책의 南冥集과 學記類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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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의 묘소는 멀리 지리산 천황봉에서 내리 달린 래룡이  머물어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형국이며, 묘소는 회룡고조형에 잠두혈이라 학풍 회장님은 설명한다. 옥녀가 비단을 짤 수 있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아주기 때문인 것이고, 길이 현이고 실이니 남명학이 점점 각광을 받고 있는 징조이니, 잠두나 옥녀는나 비단의 완벽한 형국이 아니겠는가?
 
  남명의 산천재를 돌아보고 우리는 마지막 주남저수지의 철새 도래지를 찾아 선걸음으로 달렸다. 늘 오가던길이라도 한번만 길을 지나치면 다시 돌아오기가 힘들듯이 도로상에서 여러번 괘도수정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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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은 심안으로가 아니라 자세히 보면 해저문 호숫가에 물오리 두마리가 다정히 유희하는 부부애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이를 끝으로 귀행길에 접어들었고 답사 뒷풀이는 서창 덕계에서 한바탕 술로 선후배가 어울어지는 날밤을 세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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