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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고 동문풍수지리학 8월 답사(학성고 모교) 2008년 8월 22일 18시
* 鶴 (두루미): 두루미목 도루미과로 일명 두루미이다. 학은 길조(吉鳥)로써 가족단위로 논이나 갯가, 늪지 등에서 생활한다. 다른 말로는 鶴, 白鶴, 仙禽, 仙鶴, 野鶴, 胎禽, 丹頂鶴이라 부른다. 머리위에 빨간색을 띠며, 이마와 눈은 흑색, 목과 목덜미는 암회색, 꽁지는 짧고 다리는 회색을 띤것이 특징이다. 학의 새끼는 처음 태어났을 때, 어미와 같이 하얀색에 검은 깃털을 갖고 있지 않고, 마치 오리새끼처럼 갈색에 가까운 노란빛을 띤다. 학은 소나무 위에 둥지를 트는 일이 없고 백로와 마찬가지로 개펄에 내려서 먹이를 찾는다. 둥지는 땅 위에 짚이나 왕골, 마른 갈대를 높이 쌓아 올려 짓는다. 포란은 암· 수가 공동으로 하는데, 포란 일수는 32~33일이며 생후 6개월간 어미의 보호 아래 있다. 그리고 옛사람들은 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학을 생포하여 깃촉을 잘라 날아가지 못하게 하여 길들여 키웠다. 학은 세계적으로 약 1600마리 정도만 남아 있는 멸종위기의 희귀한 새로써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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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학이나 두루미를 보면 그 처세가 고고함을 뜻한다. 학이 하늘을 날면 출세요, 뜰에서 놀면 귀한 자식을 얻고, 알에서 학의 새끼가 나오면 서적을 출판하며, 동자가 학을 타고 내려오면 대학자가 태어난다고 한다.
여기에서 "鶴城"이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高麗史地理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羅季 有鶴來鳴 故稱神鶴城 一云戒辺城 一云皆知辺 一云火城郡" 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기록은 신학성을 설명한 글인데 이를 계지변이나 개지변 화성군으로도 이른다고 하였으니, 개지변은 신학성이요, 신학성은 학성지방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지변이란 변방의 신산이라 뜻을 가진 것인데, 국어로 된 이 개지변은 漢式으로 고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임관군에 딸린 하곡현 안에서 성장하였던 한 성읍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지변을 고쳐 부른 것이 학성이며, 이 학성의 유래는 아래에 쓴 <慶尙道地理志>에 잘 나타나 있다. "本戒辺城 在新羅時 皆稱神鶴城 其稱鶴城者 天復元年辛酉有雙鶴咬全金神像 鳴於戒辺城神頭山 郡人異之因神鶴名之" 라 적고 있다. 이는 <경상도지리지>가 울산의 연혁을 설명한 것인데, 학성이라는 것은 효공왕 5년 (901)에 쌍학이 부처를 물고 신두산에 내려왔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신학성이라 하였던 것이며, 여기서 신두산은 지금의 학성공원을 말하는 것이다.
<新增國輿地勝覽>에서도 학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경상도 지리지와는 약간 달리하고 있다. "世傳戒辺天神駕鶴降神頭山主人壽祿故或謂之鶴城"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김극인의 태화루 시서문의 일부분이 되기도 했으며 여기서는 사람들이 수록을 주장하였다는 목적의식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러한 자료 외에도 경상도지리지에 신라시대 울산을 대표하는 朴允雄 장군의 직함이 "神鶴城將軍"이라 불렀다. 신학성은 지금의 학성, 반구 양동을 중심으로 하였던 그 일대 성읍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신학성을 지배하였던 장군이 바로 박윤웅 이라는 것이다.
박윤웅은 울산박씨로서 울산박씨 세보에서도 "公 蔚山縣人 生于本邑舊校洞 梁末貞明4年 佐麗太祖 唐路王淸泰二年乙未 統合三韓爲翊贊功臣" 이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박윤웅은 반구동 구교마을에서 태어났고, 고려 태조 일년 (918-신라 경명왕 2년)에 태조의 개국을 도와 태조 18년 統合三韓 翊贊功臣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興麗公 初居鶴城 道詵到此訪 而奇薦于"라 는 기록이 있다. 이를 풀이하면 "박윤웅은 처음에 학성에 살았는데, 도선이 이곳을 찾아 뛰어남을 보고 천거하였다는 것"이다. 즉 박윤웅이 학성에 자리 잡았을 때 먼저 도선(827 흥덕2년 ~ 898 효공2년)이 그 풍수지리를 보고 뛰어나다 하여 천거를 하였다는 것이니, 이 문맥에서는 이거하여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울산의 젓줄인 태화강의 오산 觀魚臺에는 암벽화가 있는데, 거기에 天鶴圖와 黃龍圖 그리고 萬龜圖가 있었다. 1996년 수로공사 때 멸실되고 지금은 구각도만 남아 있다. 그 천학도 그림 밑에는 천학이라는 암각이 있었다.
학 (두루미)의 종류로는 재두루미, 흑두루미, 시베리아두루미, 관머리두루미, 흰볼관머리두루미, 볼장식두루미, 오스트렐리아두루미, 검은꼬리두루미, 쇠재두루미, 검은목두루미, 케나다두루미, 미국큰두루미, 큰두루미, 푸른깃털두루미가 있다.
* 백로: 황새목 백로과이다. 부리와 다리를 제외한 온몸이 순백의 하얀색을 띤다. 또 백로는 두루미와는 달리 새끼 역시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같은 색을 띤다. 백로의 날개쪽을 잘 보시면 깃털이 다른 새들과는 좀 다르고, 털이 길고 가늘게 나 있어서 바람에 흩날리면 깃털이 날리는 것이 백로의 특징이며, 목은 s 자로 하고 있는데 목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날 때도 목을 구부린 채로 난다. 다른 말로는 해오라기, 鷺鷥, 白鳥, 絲禽, 雪客, 舂鋤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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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새: 백로목에 황새과로 백로와 비슷하나 날개 길이는 66cm정도이고, 온몸이 순백색에 가깝고 눈 주위와 피부는 백색이며, 어깨깃과 날개깃은 광택있는 흑색이며 부리는 흑색이며 다리는 암적색이다. 소나무 같은 큰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살며, 발에는 물갈퀴가 있고 다리가 길다. 다른 말로는 鸛, 鸛鳥, 白鸛, 負金, 早君, 黑구, 해오라기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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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학성을 돌아다 보고
학성 공원을 올랐다. 이 사진에서 얼핏 보이듯이 비석같은 돌에 "神鶴城"이라 새긴 글씨에 대해서 공부좀 하자고 벼르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정상에 올라가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돌의 형상이 자연석인지 가공석인지를 보았다. 몸체돌의 형상을 갖추기 위해 모서리를 가공한 흔적은 보이나 옮겨온 돌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자연석으로 어울어진 자그만 연못 주위의 돌 가운데 자라가 있는 형상을 보았다. 그렇다면 옛 지명 가운데 '鰲山'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뇌리를 스친다. 또 그냥 표짓돌이라면 무심코 지나치겠지만 만약 신학성의 신선을 모신 곳이라면 이는 의미가 달라진다. 마치 신선이 울산 고을을 지키고 있는 듯해 보이기도 한다. 또 이곳이 신학성이라 불리워 지던 곳이 아닌가? 학이라면 이곳에서 미래의 울산 고을의 인재를 배출할 알을 품고 있는 신학성의 '鶴'이란 말인가? 조심스레 이리저리 둘러 본다.
가까이 보면 "神鶴城"이란 글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돌의 크기는 가로 x 세로 x 두께가 1.1 x 1.3 x 0.5미터 정도의 크기였다.그러나 어떤 어설픈 도반이 탁본을 한답시고 먹을 흘려 문화제를 접근하는 방법이 너무 어리석어 잠깐 말을 잊는다. 우선 자연석에다 글씨를 쓰고 각 했는데, 우선 右上左下로 내려오면서 비스듬하게 글씨를 각했다. 왜 하필이면 비스듬하게 글을 옮겼을까? 혹 나라 잃은 설움에 시대를 한탄하면서 빠른 독립을 위해서 비스듬하게 글을 옮기지나 않았을까? 뇌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전체 몸돌의 크기에 글자의 포자는 글자의 균형미와 곁들어 아름다운 한 작품을 연상케 한다. 먼저 글자의 "神"자를 보자. 석자의 글씨 가운데 '神'자는 반듯한 楷書의 정자체로 쓰고 각했다. 서체는 당나라 해서체의 본보기인 "歐陽詢"체를 섰다. 그러나 정자이면서 전체 여백을 의식한듯 오른쪽의 "申"자의 종획을 조금 길게 내리 그었다. 글자는 단아하고 깔끔하며 각 또한 깊게 각한 것이 인상적이다. 또 재미있는것은 '神'자가 신학성의 신들과 빠른 교감을 갖기 위함인지 표짓돌의 머리맛까지 자형을 올려 쓰고 있다. 각의 깊은 골은 약 1.5센티미터 정도의 굵기로 각을 했다. 각 또한 전문적인 석공이 글자의 양변을 쪼아 각을 했음을 엿볼수 가 있다.
몸돌의 전체 포자를 보면 '鶴'자는 정 가운데서 조금 위로 올려다 섰다. 이는 '神'자의 구성과는 달리 흘림체의 자형상 몸돌의 여백을 구성하다 보니 오려 쓴것 같아 보인다. "鶴'자는 보다시피 흘림체의 초서로 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잠겨 섰을까? 아니면 나라 찾은 기쁨에 넘쳐 내리 흘려 섰을까? 지금을 알 수는 없지만, 자형으로 보아 기쁨에 겨워 쓴 듯해 보인다. 글씨는 마음의 표현이다.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그러니 글씨 또한 자획들의 흐름을 들여다 보면 그 시대의 정활들과 그 사람의 심중과 의중을 읽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성'자 또한 흘림체의 초서로 했다. 글씨는 아주 깔끔하고 운치가 살아 있는 듯해, 쓴 이의 마음을 읽어 볼수가 있다. 아마도 글을 쓴이는 옛 울산 고을의 풍부한 학식에 꼿꼿한 선비의 한 표상을 본 듯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글씨는 전체적으로 정자 한자와 흘림체 두자로 구성하였지만 어느 한곳도 빈틈없는 단아한 맛을 볼수가 있다.
학풍이여! 이곳을 한번 보라. 마치 거북이나 자라가 머리를 내밀고 동해바다나 태홧강을 나아가는 듯해 보이지는 않는가? 이곳의 옛 지명이 바로 오산이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학풍에 몸담으면서 몸소 깐에 느낀 최고의 열락이었다. 해답이 많이 있는 듯해도 늘 역사는 말이 없다. 답을 찾으려하는 자만이 빠른 길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라의 머리를 보라. 얼마나 짓밟히고 잘리고 민족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가? 마냥 가슴이 아프다. 이곳은 본디 토성이 쌓아 있던 곳이다. 그런데 왜침이 있은 이후로 산 정상을 깍아 내려 평평한 곳에 진지를구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의 깊이는 약 50세티미터였으며 간혹 행인들의 말에 의하면 가물면 마르기도 한다고 전언한다.
또 여기를 보자. 신학성이라 새긴 먼 발치에 또 한곳의 자연석에 글씨를 볼수 가 있다. 이는 바로 태홧강과 동해바다를 바라다보는 곳에 새긴 글이다. 글씨는 곧 "江自流"라고 새기고 있다. 곧 강은 스스로 흐르는데 왜 우리 고을민들은 이렇게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살아가는지를 대변하는 듯해 마음이 숙연해 졌다. 왜 우리는 늘 외침을 받으면서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가? 라는 신세를 한탄하듯이 후세를 위한 충고 섞인 글씨는 아닌지! 글씨는 반뜻하게 정신과 얼을 차려서 쓰고 뼈를 깍는듯한 필치로 각을 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아직도 이런 설움을 모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긴 외침을 보는 듯해 마음이 아팠다. 오늘도 현충일이지만 입구에서는 그네놀이를 한다고 주차장을 온통 빌려 음식점을 설치하고 학성 중턱에는 무대설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우리 선현들인 호국영령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잠든 곳이 아닌가? 예전에는 이곳 신학성 정상에서 고을민의 콩쿨대회도 열리고, 풍물대회도 해마다 열렸다고 하니 역사에 몸을 담군 나를 부끄럽게 질책을 한다. 우리 학풍이여! 우리 주위에도 이런 곳은 눈뜨고 보면 수없이 많다. 이것 하나만에도 정신을 차려 올바르게 인식한다면, 우리 학풍은 이 시대를 살면서 한가지는 똑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바로 울산 사랑 학풍 사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