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웃세오름의 고요를 추억하며......>
수년 전, 선작지왓의 싱그러운 초원에 선홍빛 철쭉이 만발했을 적에 윗세오름에 처음
올랐었다. 그곳 분들이 웃세오름이라고 이름하는데도 굳이 표준어로 윗세오름이라
세련된 입술로 말하는데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웃세오름이라고 투박하게 말할 적에
산의 진솔함이 힘차게 느껴진다. 웃세오름......
영실-어리목 코스 잇는 정점에 윗세오름 대피소가 있다. 정작 그 '오름'의 정상부는 대
피소 서편에 누워있지만 정상 서북벽을 넋놓고 바라보게되는 대피소 뜨락에서는 안중
에 두지 않게된다.
영실코스나 어리목 코스에서는 철옹성 같은 서북벽 정상을 그저 바라만보게 되지만, 성
판악쪽에서 오를 때는 완만한 능선으로, 마지막 땀을 흘려 이마 끝에 가늠되는 백록담
정상부 능선에 올를 수 있다. 대조적이며 판이한 등로의 차이로 인해 영실-어리목 코스
는, 비록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내겐 강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게 강했던 그 인상이란, 영실 코스의 선적지왓 평원과 어리목 코스의 만세동산 주위의
평원의 고요, 즉 "산정山頂의 고요함"이었다.
<산행의 시작>
해발 1400 표지석과 가파른 경사를 숨차게 오르니 영실 기암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제주
도의 서남쪽 해안선이 뒤로 펼쳐진다. 저기가 어디고 여기가 어딘지는 관심 밖이었다. 오
직 눈 앞에 느껴지는 눈경치의 조화, 쌀쌀하면서도 코 끝이 찡하고 피부의 촉감이 감미로
울 지경의 한기(寒氣), 걸을 때 마다 사각사각이는 발 아래의 느낌, 그리고 이 푸른 하늘
아래의 하얀 고요...... 마음은 그곳에 갈 뿐.
<일주일 전부터......>
애초에 제주행이 결정되었을 적부터 내 역할은 산행안내라고 여겼다. 열흘 전부터는 민
감하게 일기예보와 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뜻하지 않게 11월 18일에 첫 눈이 내
리면서 일시 입산통제가 이뤄졌고 25일경에는 그 많던 눈이 일시에 녹는 블로그의 사진
들이 이어졌다.
27, 28일에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적설이 예감되었다. 더이상의 실황기록
을 접할 수 없었으나 29일 공항에서 내린 저녁에 영실지소로 확인해보니 상당한 적설
이 있으니 안전산행을 요한다는 반가운 소식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나와 함께한 5명의 선배 산우님들은 모두산사랑 회원분들이다. 그중 문회장님과 폴 선
배는 나와 함께 사진에 열을 올리시는 편이니 시간안배를 넉넉히 하면서 예약된 시간내
에 산행을 마치면 되었다.
<새벽에.......>
행복하게도 새벽 5 시부터 두시간 동안 깨어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4시
에 깨어나 산행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스트레칭 후, 쾌적한 좌정의 시간과 마주했다.
작년 겨울의 한라산 설경이 떠올랐다. 눈보라 치던 정상 바로 아래 설사면의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금일 산행의 무탈과 무사를 간절히 발원했다. 아무리 짧은 코스지만
고산지의 눈산행은 어떤 돌발상황이 다가올 지 알 수 없는 일. 산 아래 도착해서 궁상을
떨 수 없으니 이 자리에서 한라산과 자연의 섭리에게 온 마음으로 엎드렸다.
호흡은 길게 그리고 나즈막하게 아래로 가라앉고, 무수한 말을 이끌어내는, 대뇌와 입
술로 연결된 무의미한 사슬들이 제거되었다. 됐다. 편안히 산으로 들 수 있게 되었다.
설원의 고요를 밝고 명료하게 상상했다.
<즐거운 사진놀이......>
폴선배는 오늘 나의 모델이 되었다. 훤칠한 키와 단단하게 매무새진 차림에 빨간 머풀러
까지 더하여 순백 설원의 액센트가 되어주었다. 그토록 많이 찍은 단체사진을 이 한장으
로 요약하는 것이 서운하지만 사진을 선별하는 것은 원래 혹독한 버림의 과정이다......^^
마침내 이 많은 사진 중에서 딱 한장의 사진으로 산행기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사진을 좀 알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도 다 버리고 산행기도 생략할 수 있
을 때, 비로소 산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구름바다같은 눈밭을 내려다보며......>
능선 아래로 수백미터 떨어지는 벼랑. 그 아래로 구름바다와 같은 잔잔한 물결이 일어
그 유명한 영실 적송지대에 다다르고 있다. 적송지역은 또하나의 회오리된 눈의 물결
을 이루고 있다.
내가 선 곳이 하늘이요, 크게 굽이친 능선금 저 아래 멀리 구름바다가 펼쳐지니, 애써
하늘 넣고 바다 넣고 산 넣고...... 그런 그림 만들 필요가 없다. 이런 사진을 좋아하면
서 부터 산에서 찍을 거리가 너무나 많아져버린, 놀라웠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
<늘어난 영실매표소-휴게소 구간 2.4 Km >
새로이 단장한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도시락 없이 행
동식으로 산행을 하기 때문에 점심은 하산 후로 미루어야했다. 별 생각없이 [영실->윗
세오름 3.7 km], 휴식과 [윗세오름->어리목 4.2 km]는 넉넉 4시간이면 심설산행을 감안
하더라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공원 영실지소에서 팔각정 영실휴게소까지 눈으로
인한 도로통제를 감안해야하므로 1시간 정도 더 소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길사고에 엎친 위험>
아니나 다를까. 4륜구동을 제외하고는 매표소 주차장에서부터 통제되었다. 뽀드득거리
는 하얀 아스팔트를 걷는 기분은 추가된 거리와 시간의 소요에도 불구하고 상쾌했다.
친근한 선배들과 함께하는 편안함에다 체력소모가 적은 단거리, 경험된 코스, 예상외로
그닥 춥지 않고 바람이 어제같지 않은 날씨의 도움으로 적잖던 마음부담을 다 털어낼 수
있었다.
무릇, 통제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넓은 길에, 이 정도 눈에 차량진입을 못하게 한
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지 얼마지 않아 두 대의 사륜구동차가 추돌한 장면을 목격
하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사고처리를 막 정리하려는 순간에 다시 내려오던 차...
우리가 조심하라고 급히 소리쳤으나, 사고차량으로 길막힌 현장을 발견하고 브레이크
를 밟는 순간 세바퀴를 회전하면서 둔중하게 미끄러져 내렸다.
혼비백산한 두분의 등산객이 도로바깥으로 몸을 날리고 미끄러진 차량은 비켜선 도로
한켠으로 절묘하게, 정말 운좋게도 빠져나갔다. 어어....하는 한순간에 생긴 일이었다.
사고는 언제나 예견되어야 하고 안전을 강조하는 것에는 지나침이 없는 법이다.
<설원의 선작지왓, 은빛 얼음벽으로 우뚝한 한라산 북벽>
겨울이면 영실 기암에 얼어붙은 설화와 구상나무의 눈꽃 터널이 최고의 볼거리라고 하였
는데 오늘 그 최고를 고스란히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구상나무 지대를 벗어나 꿈에도 그
리던 선작지왓 바라뵈는 입구에 들어서니 한라산 정상부가 빛나는 은색자태로 솟아 있다.
버스에는 우리 여섯명과 이 세 분이 동승했다. 너무나 정다운 인상들이시다.
겨울 한라산에서는 언제나 독사진을 남기게 된다......^^
선, 작지 -조금 작은 돌, 왓 - 들판 ...... 돌들이 널려있는 벌판.
선작지왓 머나먼 수평선에 눈과 구름이 구분이 없고......
<하얀 고요의 품으로......>
짙푸른 초원에 붉은 철쭉 흐드러졌던 이곳이 은빛 침묵으로 다가왔다.
오늘 새벽, 방 한켠 마룻바닥에서 대면했던 고요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소리 없는 함성으로 진군하는 장군처럼......
감격에 겨워.
구름과 눈 사이로 햇살 가득한 바다가 보인다.
구름과 눈과 바다가 가까운 것이 겨울 한라산의 묘미.
<고요한 바람의 힘>
그래도 바람의 끝은 매섭다.
겨울 한라산 선작지왓을 뒤덮는 강풍은 소리가 없고
다만 귓가를 스치는 울림만 남길 뿐이다.
광활하면 울리지 않는다.
걸림없는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으나
언제나 거세고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다.
오직 걷는 자 만이 그 고요한 바람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직선, 고요한 사선으로의 이동......
곡선...... 바람이 만들어내 고요
오름...... 바람이 힘을 모으는, 가슴 팽대한 숨죽임.
윗세오름 대피소의 고요.
오늘은 까마귀 조차 조용하다.
< 어리목 하산길 >
무릎이상 푹푹 빠지는 적설은 바람따라 고운 결을 빗어냈다.
북벽을 뒤돌아 보다.
무서운 침묵이 북벽의 칼능선에 얼어 붙었다.
푸른 하늘금 하얗게 긋는 능선...... 세상에 저리도 부드러운 곡선이 또 있을까.
잔물결이는 적설의 표면에 이는 곡선은 찰나의 바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저 오름들의 유순한 곡선은 만고의 세월동안 바람이 빗어낸 것이라.
어리목 내려서는 완만한 길에 먼바다가 비치기 시작하고
만세동산 위로 정오의 햇살이 내린다.
우리와 같은 속도로 진행한 일본 관광객들.
한치 흐트림없이 대오정연하게 이동하는 격식이 놀랍다.
쉼터에서도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매너도 빛났지만,
포착된 여인의 미소가 햇살보다 빛난다.
만세동산 곁길에서 한라산 정상 북벽을 바라보는 이 감동은 언제나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어리목 계곡
사제비동산에서 하염없이 내려서는 사면 끝으로 해안을 조망하며......
어승생 오름 아래 어리목 주차장까지 정확히 4시간 반 걸렸다.
<내게 설경은......>
눈에 익숙한 사람들과 달리, 부산 생활 3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설경은 '만나러가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눈은 오는 것이라지만 더이상 내게로 오지않았다.
유소년 시절 겨울 새벽녁의 특유의 포근함이 창호지로 통해 느껴질 때....... 아! 눈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각성은 언제나 들어 맞았다. 문을 열면 마당에 소복한 눈이 파랗게 가득
했다. 붉은 벽돌로 세운 장독대의 푸른 눈은 어찌 그리 아름답던지...... 내복바람에다 양말
도 없이 마당으로 나가 눈을 만져보고는 시린 손을 사타구니에 찔러넣고 대문을 열면 푸른
새벽은 눈으로 서서히 하얗게 밝아지는 듯 했다.
추운데 뭐하냐 어서 방을 들어가...... 기척을 느끼셨는 지 큰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소리
가 다정하다. 아! 그 때의 아버지....... 폭설이 내리면 모든 일을 마다하다 눈사람을 만들어 주
시며 눈사람의 눈은 언제나 숯으로 꾸미시던 당신은 언제나 눈과 함께 추억됩니다......
<나이가 드니...... 눈이오면>
눈이 오면 되도록 산으로 간다. 설경 자체가 환희지만, 순백의 고요야 말로 적설이 주는 최
고의 선물이다. 뇌세포와 입술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묵언의 또다른 표현이지만, 내
가 무슨 수행정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아가는 모습을 그저 소박
하게 바라는 것일 뿐이다.
세상에 드러내는 소리가 가득하고도 넘치는데 내 소리까지 더할 바가 있는가. 그러나 이런
글나부랭이도 또다른 함성임을 자각한다. 아직은 외로워하는 내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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