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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3

이성호(07) 작성일 09-01-08 19:19 9,125회 1건

본문

109. 제주 4.3항쟁(1948.4.)
(월간 사회와 사상, 1988년 12월호, 중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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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4.3사건으로 강제 소개된 어린이와 부녀들, 노인들. 1948년 5월. 제주도 거의 대부분 산간 지역의 마을 주민들이 유격대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해안지역으로 소개되었다.
거주지에서 쫓겨난 제주도 주민들.
110. 이덕구의 죽음(1949.6)
(이성광, 민중의 역사, 열사람, 1989, 118 ; 우리교육 1990년 4월호,15 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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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유격대 총사령이었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교래리 근처 오름에서 경찰의 총에 사살되었다.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체가 전시됐다. 때묻은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웃도리 주머니에는 수저가 꽂혀 있었다. 입가에는 피를 흘리고헝클어진 머리에 둥근형의 얽은 얼굴, 형틀 옆에 내걸린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는 글이 그가 누구인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자는 공비의 수괴 이덕구로서 대한민국 국시를 범한 반역자이다"는 포고가 걸려있었다.
'제주 4.3항쟁'의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장두가 효수돼 내걸렸던 바로 그곳에 전시됨으로써 장두의 운명을 따랐다.
이덕구는 1920년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입명관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1945년 귀향하여 1946년 조천중학원 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해 '4.3' 발발 직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된 인민유격대의 '3.1지대장'을 맡았다. 48년 7-8월 사이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을 맡기고 제주도를 빠져나감으로서 그가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제주 4.3항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선 '몸이 날래 지붕을 휙휙 넘어다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제주를 떠나버린 1대 사령관 김달삼과 대비하여 동경을 받기도 한다.
조천중학원에서 학생들은 인기높은 역사.지리 선생 이덕구를 "박박 얽은 그 얼굴 / 덕구 덕구 이덕구 / 장래 대장가심(감)"이라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경찰쪽은 "사살했다"고 밝혔으나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일족도 비극적인 길을 걸어, 부인 양후상과 5살짜리 아들 진우, 2살짜리 딸도 죽었다. 주민들은 당시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큰현 호구의 부인과 아들딸, 둘째형 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동생 신구.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었다.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3).
111. 남북협상, 방북하는 김구 일행 (1948.4.19)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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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다짐.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통일을 위한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 오른쪽은 아들 김신, 왼쪽은 비서 선우진이다.
112. 5.10 선거(1948)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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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능주면의 5.10선거투표 광경. 선거를 시찰한 UPI통신사 특파원은 "미군 정찰기는 상공을 비행했으며, 선거장이 있는 곳에는 야구용 타봉을 든 '향보단' 단원들에 의해 엄중히 경호되고 있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용 타봉, 곤봉 등을 휴대했고, '조선경비대'는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했다. 분위기는 마치 계엄하의 도시 같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113. 대한민국정부 수립(1948.8.15)
(한길사,한국사 17, 1994,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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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의 정부 수립 경축장. 1948년 8월 15일 오전 11시 20분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정부 수립 기념식은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 부부를 비롯, 해외 사절단과 정부 각료.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9.9)
(중앙일보사,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9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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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홍명희, 네번째가 김일성 수상, 다음이 박헌영(부수상겸 외상)이다. 김일성 바로 뒤쪽 왼쪽부터 주영하 장시우 최창익의 얼굴이 보인다. 몇명을 빼고 모두 젊은 사람들 모습임을 알 수 있다.
115. 여순사건(1948.10-1949)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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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116. 반민특위 투서함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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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전남 광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에 설치한 투서함에 투서하는 모습.
국회는 1948년 9월 7일, 전문 3장 32조로 된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정부가 9월 22일 공포하였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박흥식을 제1호 체포한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월 22일 노덕술을 구속하였다. 5월 20일 반민족행위자 처단 사업을 추진하던 이석원 의원등 세 명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던 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무허가 집회를 열고 구속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6월 4일에는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과 종로서 사찰과 주임을 반민족행위자 피의자로 체포하였다.
117. 끌려가는 반민족자들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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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발효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묵여 법정으로 끌려갔다. 1949년 2월 끌려가는 친일파들, 앞에서 세번째가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
118. 반민특위 기습사건(1949.6.6)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중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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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기습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이다.
119. 김구암살(1949.6.26)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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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낮 12시 서대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직후의 백범 김구. 7월 5일 국민장.
120. 여성 게릴라
(월간 사회와 사상, 1988년 12월호, 중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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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0일자 뉴욕타임즈에 실린 이 사진의 설명문에는 이 21세의 남한 게릴라는 31명의 다른 게릴라들과 함께 붙잡혔다고 적혀 있다. 이 집단의 모든 여성대원들은 그 후 자신들의 지휘관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있는 채로 사진을 직혔다.
121. 비극의 평양철교(1950.12.4)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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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으로 파괴된 철난간을 타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있다. 살인적으로 추운 날이었다고 한다. AP 통신의 막스 데스퍼가 찍었다. 1951년 이 사진은 사진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122. 거창 양민학살 사건(1951.2.11)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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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이후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조사했을 때 발굴한 금이빨이 박혀있는 유골. 이때까지만 해도 거창사건은 '거창 공비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알려져 있었다.
123. 움막살이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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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전남 화순 난민촌의난민들.
124. 노래하는 이화여대생들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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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6월 부산,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했을 때 그의 집에 초대된 인사들.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장군. 문밖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은 여흥을 돋구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이화여대 여학생들. 검은색 군화와 흰색 얄발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125. 휴전협상(1951. 11)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1995,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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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상이 시작된 직후인 1951년 11월 26일 하나의 안으로 제시된 휴전선을 지도에 그려놓고 서명하는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C 머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 대령. 판문점에서 있었던 이 서명식에 한국군은 휴전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참석하지 않았다. 정식 휴전협정은 이로부터 1년 8개월 후 53년 7월 27일에 조인되었다.
126. 발췌개헌 (1952.7.4)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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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개헌안에 대한 거수 표결을 하는 순간. 손을 든 의원들이 내키지 않아 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6.25 사변을 겪은 국회는 이대통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논의했다. 국회의 동향을 알아차린 이대통령은 국회의 간선에 의한 재집권을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시도했으아 부결되었다. 임시정부는 52년 5월 25일 경남.전남북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튿날 국회의원 40여명이 타고 있는 국회 통근 버스를 빼내 의원들을 협박했다. 결국 공포 분위기 속에서 열린 국회(7.4)에서 이대통령은 직선제에 야당의 내각책임제를 섞은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의사당 주변에는 사복의 군경요원들과 무장 기동경찰 2개 중대가 쫙 깔려있는 상황이었다. 발췌개헌안의 내용은 양원제 국회 구성, 정.부통령의 직선제, 국회의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제가 주된 골자였다. 오후 9시 35분 헌정 사상 최초의 변칙 개헌안은 재적 의원 1백 83명 중 1백 66명이 출석, 1백 63명이 기립 찬성, 3명은 기권, 반대는 단 한명도 없었다. 기권은 박순천, 윤담, 유덕전 의원이었다.
 
127. 6.25 이전의 이야기 한토막
(17인에 의한 판화지상전 도록,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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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복, 목판, 1985년 작, 35*25cm.
128. 서울 - 1953
(한길사,한국사-18, 1994, 30) 임응식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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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서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실업자.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전쟁은 끝났어도 폐허로 변한 자리에서 일할 사람은 넘처 흘렀으나 질자리가 없었다. 이 시절 "봉지쌀 드셔 보셨습니까"하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29. 못살겠다 갈아보자! - 1956년 대선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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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15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
대통령 후보 신익희는 1956년 5월 5일 새벽 호남선 제 33열차를 타고 강경을 지날 무렵 심장마비로 급서. 이날은 어린이 날이었으며 비가 부슬 부슬 내리다가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억수로 쏟아졌다
130. 진보당 사건 - 공판정의 조봉암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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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월 13일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시경으로 자진 출두하는 도중 보안법 혐의로 검거되었다. 사진은 2심 공판정에서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조봉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한 뒤 야당 대통령 후보는 진보당의 조봉암으로 단일화 됐고,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이 자진사퇴해 야당의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장면으로 단일화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핵심 주도 세력인 조병옥 김준연 등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은 지원할지언정 조봉암을 지원할 수 없다", "야당 세력에 조봉암을 가담시킬 수 없다"는 강경론을 폈다.
조봉암은 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인 윤길중 김세룡 박기출 등과 거물 간첩 양명산이 체포된 다음날인 1월 13일 구속되었다. 조봉암과 양명산은 1심에서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극우 단체들의 법원.판사집 난입과 정권측의 거센 항의 뒤에 열린 2심에서 둘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59년 7월 30일 대법원은 이들의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이정권은 7월 31일 두 사람의 사형을 신속하게 집행하였다.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용인할지언정 죽산을 지원할 수는 없다'는 야당의 냉전적 사고방식 속에서 조봉암 제거의 역사적 음모는 가능했다.
131. 3.15부정선거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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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1960.4.11)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15) 부산일보 허종 기자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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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에 대한 마산 시민들의 항의 시위 당시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김주열군의 시체가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3월 10일 전북 남원에서 마산시 장군동 할머니집에 와있던 김주열군(17세)은 그날 밤 속옷 바람으로 구경을 나났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간이 신문에 실린 뒤 학생들 뿐 아니라 시민들도 합세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자"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제2마산시위를 전개하였고, 마산의 시위는 4.19로 이어졌다.
 
133. 4월 혁명 1 - 4.18 고대생 피습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37) 정범태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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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 고대생과 3천여 서울지역 대학생.시민들이 '마산 학생 즉시 석방' '3.1정신으로 민주정치 이룩하자'고 외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60년 4월 18일 오수 6시 35분경 고대생들이 천일백화점 부근 종로 4가에 이를 무렵 양쪽 길가에서 1백여명의 깡패들이 튀어나와 쇠뭉치, 벽돌, 삽, 몽둥이 등으로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선두 학생 40여명이 깡패들의 난동에 피를 흘리며 무더기로 쓰러졌다. 책가방과 신발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당시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가 유일하게 4.18 고대생 피습사건을 찍었다.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스트로부를 터뜨리며 세 컷을 찍었는데 사진이 살았다. 4.19 아침에 조선일보 사회면에 톱으로 이 사진이 실리자 깡패들까지 동원 데모군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썩은 정부를 규탄하는 성난 군중들과 학생들로 서울 장안이 가득했다. 다음날 취재차를 타고 종로 4가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사격자세로 검문하며 지프에 붙어 있는 조선일보 사기를 찍고 "조선일보 개새끼들, 차에서 내려 손들어"하며 고함을 치는 것과 동시에 총을 발사하였다. 정범태 기자의 겨드랑이를 지나 운전석에 앉아있던 운전기사 조광집이 배에 총을 맞고 피살되었다.
134. 4월 혁명 2 - 4.19 시위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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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중앙청 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4월 혁명 과정에서 143명이 사망, 625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35. 4월 혁명 3 - 교수시위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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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서울시내 각 대학교수들의 시위. 결정적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가져오게 했다.
136. 4월 혁명 3 - 쓰러진 이승만 동상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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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쓰러져 어린이들의 놀이감이 되었다.
137. 통일운동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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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5.16군사쿠테타 주역들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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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8일 시청앞에서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는 박정희와 쿠테타 주역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139. 박정희와 혁명공약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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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0.18 기자회견중인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뒤에 박태준 준장이 앉아 있다.
박정희 생애
ㅇ 1917.11.14 경북 선산에서 출생
ㅇ 1932 구미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ㅇ 1937년 봄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 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 생활
ㅇ 1940 일본인이 운영하는 만주 장춘의 군관학교 입학
ㅇ 1942 만주군관학교 수석 졸업 - "대동아 공영권의 완수를 위하여 사꾸라처럼 깨끗이 지겠습니다." 하는 요지의 졸업생 답사를 하였다 함. 그리고 일제는 이 광경을 문화영화로 만들어 만주 일대에 널리 방영하였다고 한다. 만주국 황제 부의에게 금시계 졸업 선물 하사 받음
ㅇ 1942 동경의 일본육사 입학 -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 사용
일본인 교장이 일본인 보다 더 일본인 답다고 칭찬 - 별명 '특등 일본인'
ㅇ 1944 일본 육사 57기 졸업생 중 3등으로 졸업. 일본 육군 소위에 임관,
일본내 마츠야마 제14연대 배속. 중국 열하성에 있던 만주국의 일본
관동군 보병 제8연대 소대장으로 배속, 산악지역의 항일 게릴라에 대 항하여 약100회 전투 참가. "조선놈들의 토벌이라면 내게 맡기라"(사관학교 일본인 동창들의 말) 일본명 오카모도 미노루란 이름 사용.
ㅇ 1945. 7 중위 진급. 제8연대 영안으로 이동하여 영안에서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장해제 당한 패잔병 장교가 됨. 피난민 대열에 끼여 북경으로 건너간 다음 광복군 합류, 북경지구 광복군 제1중대장이 됨. 일본식으로 훈련.
ㅇ 1946.6 미 상륙선 LST 정으로 중국 천진에서 부산으로 귀국
ㅇ 1946.9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의 전신) 간부 후보생 제2기로 입교, 3개월간 장교훈련 과정을 마친 뒤 대위로 입관. 육군 사관학교 교관을 맡음. --> 남로당 가입, 숙군과정에서 사형 언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구명으로 살아남.
ㅇ 1953 육군준장으로 진급
ㅇ 1960 '4월혁명' 당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ㅇ 1960.12 대구2군 부사령관
ㅇ 1961.5.16 군사쿠테타로 정권 찬탈
11월 14일 케네디와 회담 설정
11월 12일 이케다총리와 회담
"나는 메이지유신을 지도한 일본지사들의 기개를 본받아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겠다"
11월 13일 아카사카 영빈관을 떠나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 차가 먼발치로 이중교가 보이는 일왕의 궁성을 지나게 되자,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곧추고 정중하게 거수경레를 붙였다 함.
ㅇ 1963.12.17 제5대 대통령당선, 제3공화국 출범
ㅇ 1964 베트남 전쟁에 비둘기 부대 파견
ㅇ 1965.6.22 한일기본조약과 각종 부속협정 조인
ㅇ 1960.5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파병, 이후 최고 5만명의 병력을 월남에 주둔
ㅇ 1967 제6대 대통령 당선
ㅇ 1969 삼선개헌 강행(날치기 통과)
ㅇ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선
4.27 대통령선거 서울유세 연설문
"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에게,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산적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읍니다"
ㅇ 1971.12 국가비상사태 선포
ㅇ 1972.7.4 남북공동성명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천명
ㅇ 1972.10.17 계엄령 선포, 유신헌법 선포, 1인독재의 '유신체제'
ㅇ 1978.12.12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에 1.1% 앞섬
ㅇ 1979.5.30 신민당전당대회에서 KCIA와 연결된 이철승을 물리치고 김영삼이 11표차 로 이김
ㅇ 1979.8.9-11 신민당사 YH여성노동자 농성, 11일 경찰 신민당사 난입, 김경숙양 죽음
ㅇ 1979.9.8 서울지법 민사재판, 김영삼의 당수권한 박탈, 정운갑을 총재대행으로임명
ㅇ 1979.9.25 신민당전국긴급당원대회
ㅇ 1979.10.4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
ㅇ 1979.10.17 유신체제 7주년을 기해서 일어난 부마민중항쟁
ㅇ 1979.10.26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사망
140. 군정연장 반대시위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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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이 1963년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자 야당과 재야 정치인들 중심으로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3월 20일부터 일제히 벌어졌다.
141. 굴욕외교 반대 시위(1965)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눈빛, 1994,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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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굴욕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서울 시민들의 시위.
142. 한일협정 조인(1965.6.22)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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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조인 후 6개월 후인 1965년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 김동조 한일회담 수석대표, 정일권 국무총리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143. 월남 파병(1965)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눈빛, 1994,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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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래 최초로 해외 파병되는 한국군. 1965년 해병 청룡여단 장변들이 수송선에 승선하기 위해 열차편으로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1965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월남 파병이 개시되었다. 맹호.백마부대가 각 1개 사단, 청룡여단과 그밖에 보급과 기술관계 인원을 포함해서 약 4만 명이 월남에 상주했고, 1973년 철수할 때까지 40여만 명이 월남전을 체험했다.
144. 국민 교육 헌장(1968.12.5)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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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교육 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45.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7.7)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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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일 기공식을 갖은지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준공식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 건설 담당 기업체 사장들을 실은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위해 출발하고 있다
146. 새마을운동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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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전태일 분신(1970.11.1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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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몸부림치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
1948년 봉제노동자인 전상수.이소선씨 사이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어린 시절 껌팔이 신문팔이를 하다 17살 때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었던. 그는 평화시장 시절 열두 살짜리부터 열대여섯 살짜리 노동자들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하는 광경을 보고 그것을 개선해 보려고 69년 6월 '바보회'를 만들었다. 그 조직을 통해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관으로부터 묵살당하고 그는 해고되었다. 그후 그는 '삼동친목회'를 결성해 노동운동을 벌였으나 아무 것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온몸을 불사름으로써 그의 뜻을 알리려고 하였다
148. 광주대단지 사건(1971.8)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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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유신체제(1972.10)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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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를 발표했다. '10월 유신'의 선포였다. 그해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 유신헌법은 투표자 91.5%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1970년대 초 동아시아에 새로이 몰아닥친 데탕트가 냉전구조에 의존하던 박 정권에 압박을 가하고,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인 외채에 의한 고도성장.수출주도 경제정책이 파탄으로 치닫고, 독재와 수탈에 저항하면서 꾸준히 성장해온 민중들의 힘은 박정권의 절대권력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150. 동아일보 광고해약 사태(1974.12)- 백지광고
(동아일보, 199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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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유신반대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2월 광고무더기 해약이라는 보복조치를 가했다. 이들 광고지면은 독자들의 격려 광고로 채워졌다. 격려 광고의 내용들 가운데 일부이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된 뒤 두 해째인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개최하였다. 긴급조치 1,4호가 발동되어 군사법정에서 종교인, 문인, 언론인, 대학교수, 변호사, 대학생 등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15년 징역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을 때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 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고 천명하고 1)외부간섭배제 2)기관원 출입 거부 3)언론인 불법 연행 일체거부 등 3개항을 결의하였다. 경영진이 이 내용의 기사화를 거부하자 기자들은 제작거부로 맞서 10월 24일자 신문은 나오지 못하고 10월 25일자에 실리게 되었다. 이후 여러해 동안 금기로 되어 있던 데모, 인권회복기도회, 노동자들의 쟁의, 야당의 체제비판 발언, 개헌문제까지도 기사로 다루었다. 그러자 74년 12월 30일부터 정권의 압력을 받은 대광고주들의 광고철회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광고지면이 백지로 나가자 세계 광고 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언론 격려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학생.지식인.종교인은 물론 주부까지도 참여하여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이에 대해 정권과 경영주들은 기자를 비롯한 언론인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맞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축출된 자유언론의 주역들은 동아자유언론소호투쟁위와 조선자유언론투쟁 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유언론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80년 해직언론인협회를, 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기관지로서 '말'을 창간하였다. 87년 6월항쟁 뒤 자유언론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이들이 주축이 되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151. 긴급조치9호(1975.5.1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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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 선포를 보도한 1974년 5월 14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 유포, 학생의 정치 관여 금지 및 위반 사실을 보호하는 언론사도 정.폐간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다.
152. 명동사건 구속가족 시위(1976.5.4)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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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5월 4일 명동사건 피고인 가족들이 대법원 후문 앞에서 '공개 재판, 민주인사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검은색 테이프로 입을 십자가로 봉하고 침묵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기념미사 후에 마무리 기도 형식으로 이우정이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함세웅, 이우정, 정일형, 윤반웅,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문정현,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은명기 10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였다. 3월 2일부터 연행이 이루어지기 시작, 정부는 기도회가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발표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은 1)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고 하는 세부문으로 이루어졌으며, 결론에서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착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 묻고 "민주주의 만세"로 끝을 맺고 있다.
153. 함평 고구마피해보상운동(1976-78년)
(노금노, 땅의 아들 1, 돌베개,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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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에서 포대에 담겨져 농협의 수매를 기다리는 고구마가 길가에 방치된 채 썩어 들어가고 있다(1976년 12월).
1976년 여름 농협의 임직원들이 함평군 내 7천여 고구마 생산농가를 상대로 출하희망 전량을 전해에 비해 17.4% 인상된 고시가격으로 수매하겠다고 선전을 하였다. 농민들은 농협의 약속을 믿고 상인에게 판매할 계획도 다른 저장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수확한 고구마를 농협에서 공급해 준 포대에 담아 쌓아 놓고 농협 차가 오기만 기다렸다.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어도 농협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고구마는 눈비를 맞고 추운 날씨에 얼어 썩어가기 시작하였다. 농협수매가 진전이 없고 농민들이 불안해 하자 상인들이 1포에 1317원짜리 고구마를 600원에서 200원까지 헐값으로 사갔다. 썩은 고구마를 추려내야 되니 농민들은 이중삼중으로 막심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에 몇명의 농민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1976년 11월 23일 함평에서 농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대책위를 수립하여 피해 농가들을 조직하였다. 경찰과 농협의 방해공작을 피해가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피해 보상운동을 78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54. 자동차수출(1977)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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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부터 길이 트인 자동차 수출은 한계에 이른 일반 공산품 수출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중공업 제품의 하나로 큰 기대를 모았다.
155.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1976-1978)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 돌베개,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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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156. YH사건(1979.8.)
(한길사, 한국사-19, 199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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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농성과 김경숙의 사망을 보도한 1979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YH무역주식회사는 1966년 1월 자본금 1백만원과 10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종업원 4천명에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하였고 수출실적 1백만 달러를 달성하여 국내 수출순위 15위를 기록하였다. 회사 순이익이 12억 7천만원이나 된 이 해에 상당액의 외화를 도핀시킨 장용호 회장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동서인 진동희 사장은 장부상 10억원을 사원들의 상여금으로 지급했다고 해놓고 그 돈으로 1973년 대보해운을 설립하였다. 와이에치 노동자들은 하루 13-14시간씩 근무를 하였고 일요일도 격주로만 쉴 수 있었다. 일체의 수당과 상여금도 없었다. 와이에치 무역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국내의 와이에치 무역에서 수출한 가발대금 3백만 달러를 미국의 장용호 회장이 갚지 않아 1974년에는 은행빚이 6억 3천만원으로 늘어났다. 사세는 급속도로 기울어졌고 1979년 4월에는 폐업을 단행하였다. 7일 동안 농성 끝에 공장문은 다시 열렸으나 미국으로 빼돌린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7월 30일 2차 폐업 결정이 났다. 기숙사에서 농성하던 와이에치 여성노동자들은 8월 9일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8월 12일 새벽 2천여명의 경찰력에 의해 1백 80여명의 18세에서 23세에 이르는 나이어린 노동자들은 강제로 끌려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추락하여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157. 부마항쟁(1979.10.16)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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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웅(07)님의 댓글

박홍웅(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