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커뮤니티 열린게시판

커뮤니티

열린게시판
한줄TALK
포토갤러리
동문회 페이스북
집행부 동정
VOD 자료실
한줄광고 등록하기
졸업앨범 보기
열린게시판
이 게시판은 학고인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상업적 광고, 개인·단체의홍보, 특정인에 대한 음해·비방 등 본 사이트 운영취지와 무관한 내용은 사전 동의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2

이성호(07) 작성일 09-01-08 19:08 10,003회 0건

본문

43. 신채호 묘
043.jpg
1936년 2월 18일 단재 신채호는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급보를 접한 부인과 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한해 전 단재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단재의 옛친구이며 일가뻘되는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하였으나 친일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히 거절함. 이즈음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다가 대거 친일의 길에 들어섰던 민족 반역자들의 변명을 무색하게 하는 단재의 비타협적인 삶의 면모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단재는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 왔다. 유골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단재가 살던 옛집터에 일제 당국 모르게 모셨다. 그는 민적(民籍)이 없어 정식으로 묘소허가를 얻지 못하여 친척뻘되는 면장의 묵인하에 암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발각되어 면장은 파면되고 말썽이 많았다. 그는 살아서 "곡하고 노래하기 그마저도 어려워라"고 했지만 죽어서도 편히 묻힐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묘비 돌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구하고 오세창이 [단재신채호지묘]라고 써서 새겼다. 만해가 따로 비문을 쓰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묘비만 신백우가 몰래 내려다 세웠다.
44. 의열단 사건 기사와 김원봉(1923.3)
(염인호, 김원봉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044.jpg
제2차 암살.파괴 사건을 실은 동아일보 호외. 사진은 21세 때의 김원봉.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되었다. 일본인 관리 암살과 관청파괴등 테러활동이 중심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었으며 처음 단원은 13명, 1924년에는 70여명에 이르렀다. 김원봉은 1922년 의열단 제2차 암살.파괴 활동 계획에 착수하였다. 1923년 1월에 제2차 암살.파괴 책임자 김한이 서울에서 잡혔고, 3월에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이 대거 체포되어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45. 블라디보스톡 3.1운동 1주년 기념 항일시위(1920.3)
(독립기념관 해외의 한민족 조국독립운동 특별기획전도록, 1995, 76)
045.jpg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3.1운동 1주년을 맞아 기념 항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1910년 전후부터 서북 간도와 함께 중요 독립군 기지로 개척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찌기 1910년대 초반부터 국내의 수많은 의병과 민족운동가가 망명하여 한인의 이주와 개척을 촉진하는 한편, 십삼도의군.성명회 등의 항일결사를 조직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권업회가 주관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하려고 하였다. 연해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양성된 많은 독립군들은 한.러의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러시아 지역 독립군 기지는 만주 지역 독립군들의 또 다른 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러시아에 잔류하여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1937년 소련정부에 의해 강제 실시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이 있기 전까지 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여 조국광복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해외기지의 몫을 담당하였다.
46. 청산리전투 (1920.10)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45)
046.jpg
1921년 동북만주에서, 사진 맨앞이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 하}는 "청산리 전쟁에서 대승한 '대한독립군'은 승전 축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맨 앞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으로 설명. 고증이 좀더 필요한 사진이다.
청산리 전투 - 삼둔자, 봉오동 전투 등을 비롯한 1920년을 전후한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과 간도내의 여러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1920년 10월 2만여명의 일본군 대병력을 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들 일본군의 임무는 간도내의 한국독립군을 전멸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대병력의 침입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은 일본군 첩자들에 의해 간파된 근거지를 버리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독립군단들은 백두산록 서쪽 울창한 산림지대를 새로운 근거지로 정하여 10월 20일 무렵 청산리라 불리는 화룡현의 2.3도구 일대에 약 10여개의 독립군단이 결집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된 일본군은 이지역으로 5천여명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이들을 상대로 백운평 천수평 어량촌 등 청산리 골짜기에서 6,7일간 10여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47. 임시정부 이동로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46)
047.jpg
상해(1919.4)→ 항주(1932.5)→ 가흥(1935.11)→ 남경(1937.4)→ 장사(1937.12)→ 광주(1938.7)→ 유주(1938.10)→ 중경(1940.4)
48. 동아일보.조선일보 창간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70.71)
048.jpg
3.1운동 후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꾸고 1920년 민간언론지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의 발행을 인가,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왼쪽 {조선일보}는 창간기념 제3호(1920년 3월 7일자)이고, 오른쪽 {동아일보}는 창간호(1920년 4월 1일)이다. 두 신문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따라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는 지령 6923호, {동아일보}는 6819호로 자진 폐간하였다.
49. 민립대학설립운동
(한길사,한국사-14, 1994, 15)
049.jpg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창립총회 기념 사진, 1923년 3월 30일)
50. 경성제국대학
(독립기념관,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 도록, 1995, 11)
050.jpg
51. 김제 동진수리조합
(한길사, 한국사-15, 1994, 44)
051.jpg
김제 동진수리조합, 1925년 9월.
52. 군산항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11)
052.jpg
일본 본토로 반출되는 쌀이 산더미처럼 쌓인 군산항.
53. 암태도 소작쟁의
(한길사,한국사-13, 1994, 38)
053.jpg
위 오른쪽 - 암태도 사건이 실린 1932년 4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왼쪽 - 지주가 소작인에게 써준 계약문서. 아래쪽 - 1930년대 소작인 위안잔치.
54. 목포항에 집하된 면화
(한길사,한국사-13, 1994, 40)
054.jpg
1927년경 목포함에 쌓여있는 면화
일제는 '육지면'이라는 왜래 품종인 면화를 한국에 강제로 재배시켜, 이것을 싼값으로 수매하고, 일본에서 면직물로 가공한 다음 다시 한국에서 비싼 값으로 팔아 넘기는 이중의 착취를 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의 전통적인 면직 공업은 파괴되어 갔다.
55.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1924.4)
(한길사,한국사-16, 1994, 20)
055.jpg
전조선노농총동맹창립총회.
56.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1925.4.)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167)
056.jpg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했다가 해산되고 준비사무소에서 경관대에 의해 밖으로 밀려나는 참가자들(조선일보, 1925.4.21)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는 1925년 초부터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형평사와 사상운동 단체 등 425개 단체 5백여명의 참가 의사를 받아 대회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1925년 4월 20일 대회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경찰 당국은 집회 금지조처를 내리고 무력으로 집회 자체를 원천봉쇄하였다. 수 개월에 걸쳐 준비했던 대회가 강제로 무산되자, 대의원 3백여 명은 대회 장소인 파고다 공원에서 탄압경찰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지려 했으나 이것도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밤 9시경 민중대회 관련자들은 또다시 종로 단성사 앞과 관철동 우미관 앞에 재집결하여 시위대 수백 명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무산자 만세!'를 외치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대규모 시위는 무장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되고 현장에서 대의원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57. 조선공산당 관계기사
(한길사,한국사-16, 1994, 21)
057.jpg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신문기사
58. 순종 장례 행렬(1926)
(한길사,한국사-15, 1994, 34)
058.jpg
59. 6.10만세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35)
059.jpg
6.10 만세운동의 공판속보를 상세히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11월 3일자 {조선일보}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조선 민중이 전개한 대표적인 대중적 반일투쟁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계급적 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투쟁지도부의 목적의식적 활동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李拓)이 사망하자 전국 각지에서 조선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급격히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조공은 순종 장례일을 기해 통일적인 전국적 시위투쟁으로 전화시키고자 산하에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총책임자 권오설)를 설치하였다. 투쟁지도부를 중심으로 당원 및 인쇄직공조합원들은 격문 5만여 매의 인쇄와 전국 58개소의 지역을 잇는 조직연락망을 완성하였다. 지방과의 연계사업은 주로 노동단체, 소작인조합,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신문사지국, 개벽 지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과의 연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책임자 이병립/연희전문 문과 2년생)를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투쟁은 종로3가, 관수교, 황금정, 훈련원, 창신동 등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로 이어지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동대문 부근에서의 투쟁은 시위대들이 혈서을 쓰기도 하였으며, 시위대가 일제경찰의 군화발에 밟히는 등 처절하고 피어린 투쟁이 전개되었다. 지방에서는 인천의 만국공원, 순창, 병영, 통영, 원산, 개성, 홍성, 전주, 신천, 평양, 마산, 공주, 하동, 당진, 이원, 강경, 구례 등에서 전개되었다.
6.10만세운동으로 전국에서 5천여 명이 연행되었고 일제의 야만적 폭행으로 16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다. 또 감옥에서 고문으로 불구가 된 사람이 10명이 넘었으며, 6.10만세투쟁 총책임자였던 권오설은 적들의 간악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살해되었다.
60. 신간회 창립 (1927)
(역사학연구소, 우리역사를 찾아서 3, 심지, 1994, 86)
060.jpg
1927년 2월 15일 서울 YMCA회관에서 오후 7시 회원 500여 명과 방청객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1931년 해체될 때까지 4년여 동안 민족의 반일 역량을 결집하여 일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창립대회에서 신간회가 내건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이었다. 신간회의 회장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상재가, 부회장은 홍명희가 맡았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인 1927년 12월 27일 1백번 째 지회를 갖게 됐고, 1928년 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를 정도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61. 광주학생운동(1929.11)
(한길사,한국사-15, 1994, 36)
061.jpg
위 -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충돌사건을 보도한 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아래 - 광주학생운동을 왜곡보도한 일제기관지 {광주일보} 규탄 시위, 1929년 11월 3일)
62. 원산총파업(1929.1-4)
(한길사,한국사-15, 1994, 40)
062.jpg
오른쪽 - 원산부도노동자 대파업 광경.
왼쪽 - 원산노동연합위원장의 수감기사를 실은 {조선일보} 1929년 2월 11일자 기사.
1929년 1월에서 4월에 걸쳐 원산의 노동자 3천여명이 군대와 경찰의 탄압을 둟고 3개월에 이르는 동맹파업을 감행하였다.
한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의 횡포에 대한 규탄으로 발단된 이 동맹파업은,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등의 요구를 내걸고, 원산 시민들까지 가담한 투쟁이 되었다. 소련, 중국, 프랑스의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 받았다.
63. 을밀대에서 농성하는 강주룡(1931)
(역사학연구소, 우리역사를 찾아서 3, 심지, 1994, 119)
063.jpg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회사 쪽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고에 대응하여 파업을 시작하였다. 5월 28일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을 결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폭력에 의해 회사 밖으로 쫓겨났다. 밤 11시, 회사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밤새 광목을 마련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을밀대 누각에 던져 걸치고 줄타기를 해서 12미터 높이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가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외치고 외쳤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으로 대항하다 검속기간 만료로 일단 풀려났다. 평원공장 파업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를 때 평양서는 '정달헌 중심의 당조직사건'을 발표하고, 강주룡은 6월 9일 동료 노동자 최용덕과 함께 검거되었다. 강주룡은 또 다시 옥중단식을 벌인 뒤 '극심한 정신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보석되었다가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64. 경남 적색교원노동협의회사건(1933)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193)
064.jpg
경남 적색교원노동협의회 사건에 관한 {동아일보} 1933년 12월 12일자 본지 부재록(不再錄) 호외. 적색교원노동협의회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된 열아홉 명의 인물사진을 전부 삭제했다. 많은 인물사진을 삭제한 경우의 하나이다.
65. 브나로드 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43)
065.jpg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었던 동아일보는 1931년 7월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문맹'과 '비위생적인 상태'에 있는 농민을 계몽한다는 목표로 '배우자, 가르키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운동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66. 혁명적 농민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44)
066.jpg
함경도 단천과 명천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보도한 신문기사.
67. 해방전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중간 사진)
067.jpg
1930년대 초.중반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해방전후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들.
왼쪽부터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신화적 인물인 이재유, 경성콩그룹.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 박헌영, 해방직후 초기 북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현준혁,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허헌, 남로당의 2인자 이승엽.
68. 이재유
(김경일, 이재유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068.jpg
이재유의 체포를 대서특필한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69. 간도공산당 사건(1938)
(전민조, 이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7, 문치장 촬영)
069.jpg
1938년 12월 20일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압송되는 사회주의자들. 경성지방법원 대법정 앞. 하나같이 머리에 용수가 씌워져 있다.
70. 황국신민화교육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75)
070.jpg
1938년 4월 1일 실시한 '개정조선교육령'은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요했고, 1941년 2월 28일 히로히토 칙령 148호에 따라 '국민학교' 등장, '황국신민'에서 '국'자와 '민'자를 따왔다. 1941년 4월 1일부터는 국민학교의 조선어 학습 전폐와 함께 일상용어마저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일본어만 사용토록했다. 사진은 국민학교 '일본어독본'을 읽고 있는 어린이들.
71. 조선신궁
(한길사,한국사-13, 1994, 21)
071.jpg
서울 남산 국사당 자리에 세운 조선신궁, 1925년 10월.
72. 창씨개명(1939.11)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74)
072.jpg
일제는 1939년 11월 10일,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을 전국적으로 강요했다. 창씨 개명으로 전 인구의 8할 이상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창씨개명을 계출하기 위해 경성부청 호적과에 줄을 선 광경.
73. 노동자 강제연행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72,73)
073.jpg
위쪽 - 큐우슈우 야하타시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한국인들.
아래쪽 - 큐우슈우 도요스 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쓰인 한글 낙서.
전쟁에 필요한 증산체제를 위하여 부족되는 노동력을 충당하려고 일제는 노동자들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강제 연행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고, 형식적으로는 '모집' '관의 알선'(1942), '징용'(1944)의 세가지 형태가 있었다. 모집단계에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노무동원계획'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연행 업무를 관장했던 '노무보국회' 직원들은 이를 두고 '조선인 사냥' 이라고까지 불렀다. 전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은 채 논과 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하여 트럭에 태워 그대로 일본으로 연행하여 강제노역에 동원하였다. 1045년 8월 일본에는 2백 수십만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강제 연행이 시작된 1939년에는 100명 정도였다. 강제 연행 기간 동안 100만명 이상이 연행된 셈이다. 연행되어 간 곳은 일본만이 아니라 최전선 비행장 건설, 남태평양, 버마전선, 사할린, 아류우샨에까지 도달했다. 한국내에서는 더 많은 징용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징용되었던 것이다.
74. 징병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57)
074.jpg
1942년 5월 11일 일제는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동원해 '징병제 실시' 신궁봉고제라는 해괴한 행사를 하고 한국에 대한 징병제 적용을 '감사'하라면서 신사 참배와 시가행진을 강요하였다.
1937년 중국침략 이후 전쟁이 확대되고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한국인을 군인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는 육군 지원제도, 1943년에는 해군 지원제도 등 명목상으로는 지원제였으나, 뒤에는 할당제가 시행되었다. 1943년에는 '학도병 동원'을 거쳐 1944년에는 전면적인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지원'과 '징병'을 합쳐 싸움터로 몰려진 한국인 병사는 일제의 발표로도 23만명에 이르렀다.
75. 정신대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75)
075.jpg
'여자 정신대'라는 미명 아래, 속아서 끌려간 여성들이 중국에 도착 직후, 검진을 받으러 가고 있다.
76. 놋그릇 공출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69)
076.jpg
일제는 전쟁 말기,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놋그릇은 물론 일체의 쇠붙이를 깡그리 수탈해 갔다. 공출받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일본인들. '국어상용'의 슬로건이 보인다.
77. 애국부인회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67)
077.jpg
친일 부인단체인 '애국부인회' 경성부분회 종로 6정목 분구회원들.
78. 희망의 아침(1938)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3, 돌베개, 25.114 ; 고등학교 국사 하, 1990, 168 합성)
078.jpg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음악 분야에서는 안익태가 애국가를, 홍난파가 봉선화를 작곡하였는데, 당시의 음악인들은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감정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79. 친일 만화
(역사문제연구소, 인물로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1993, 232)
079.jpg
노수현, 멍텅구리({신시대} 연재만화, 1941.1)
심산 노수현은 일제때는 동양화단의 베스트 10이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베스트 6에 드는 화가. 화랑가에서 6대가에 드는 명망가. 그가 일제때는 만화를 많이 그렸다. 멍텅구리 내용은 "때는 비상시, 국력총동원하는 이때에, 신년새해 놀고 있느 건, 잘못도 이만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에튀, 대륙 제일선에서는..., 야, 멍텅구리, 우리도 나라를 위해 신년새해 일을 하세!, 지원병은 어떨까?, 오십당년에 못될 소리..., 차라리 자동차 운전을 배워가지고 전선에 나감 어떨까? 역시 바람이 제일이야, 그럴듯한 일일세, 그러면 내일부터라도 운전수 지망 ..., 만세 ... 만세." 청년들처럼 총들고 전쟁터에 나갈 수 없으니까 이 중년 신사들은 운전을 배워 전선에 나가겠다는, 이른바 성전에 복무해야 한다는 친일적인 내용을 드러내는 만화이다.
80. 해외이주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259)
080.jpg
1930년대 말엽, 만주의 한국인은 100만명이 넘었다. 이 숫자의 절반이 정주한 간도 지방은 항일 빨치산의 근거지이며,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81. 조선광복회와 보천보
(한길사,한국사-16, 1994, 46 )
081.jpg
오른쪽 -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왼쪽 - 재만 한국인 조국광복회의 지하공작원들.
82. 조선의용대(1938)
(한겨레신문사, 발굴한국현대사인물 3, 1992, 167)
082.jpg
1939년 10월 10일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광서성) 계림에서 찍은 조선의용대 창립 한 돌 기념사진. 가운뎃줄 왼쪽에서 열번째가 약산 김원봉. 오른쪽 위는 조선의용대 명찰.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어 대장에 김원봉, 부대장에 신악이 취임했다. 조선의용대는 약 300여 명의 대원이 3개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성숙 등).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유림),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연합체였다.
83. 광복군 (1940)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36)
083.jpg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능빈관'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 단상에 임정 김구 국무령과 김학규 총사령부 참모. 백범의 주례사, 선언문 낭독, 조소앙의 경과보고, 홍진.조완구의 축사, 중국요인의 격려사.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84. 일제항복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82)
084.jpg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막한 '미조리'함상에서 연합군 총사령과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대표.
85. 태극기 게양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6)
085.jpg
1945년 8월 전남 광양서국민학교 교정에 일장기를 변조해 만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86. 서대문형무소 출감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25)
086.jpg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독립투사들과 형무소 앞에 모인 군중들이 해방의 기쁨에 환호하고 있다.
87. 서울거리시민들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90)
087.jpg
1945년 8월 16일,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를 메운 120만 서울 시민들.
88. 여운형과 건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95)
088.jpg
해방 다음날 8월 16일 휘문중학교에서 '건준' 여운형 위원장을 환호하는 시민들. 여운형은 이날 '정치집회 제1호'를 열어 해방의 의의와 민족의 나갈 길에 대해 연설하였다.
89. 지방인민위원회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23)
089.jpg
90. 김순남 '해방의 노래'
(한길사,한국사-17, 1994, 24)
090.jpg
91. 미군 진주 1 (1945. 9. 8)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22)
091.jpg
해방된 한국에서 정치적 폭력으로 인해 죽은 첫번째 한국인 희생자. 9월 8일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피살자는 아마도 그날 죽은 노동조합 지도자인 권병권이거나 평화운동 활동가인 이석구 중 하나일 것이다.
92. 미군진주 2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24)
092.jpg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미 7사단 32보병 연대. 주위의 삼엄한 경계로 행인은 보이지 않는다.
93. 일장기하강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85)
093.jpg
1945년 9월 9일, 아베총독의 통치이양문서 서명과 동시에 서울에 진주한 미 7사단 32보병 연대가 총독부 광장의 계양대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있다.

94. 성조기게양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25)
094.jpg
총독부 건물 앞에 걸렸던 일본기가 내려지고 미군악대의 연주속에 미군기 게양.
95. 임정귀국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29)
095.jpg
임정 요인들은 미군정의 뜻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1진이 1945년 11월 23일 귀국하였고, 12월 2일 귀국하였다. 사진은 임정요인 2진 귀국 기념(12월 3일). 앞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가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뒷줄 왼쪽 두번째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봉준, 유동열, 김원봉.
96. 모스크바삼상회의 왜곡 보도(1945.12)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2, 거름, 144)
096.jpg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왜곡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 동아일보는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안을 주도하여 한국에 대해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최대 왜곡 보도였다고 할 수 있다.
97. 신탁통치반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204)
097.jpg
98.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 지지
(한길사,한국사-17, 1994, 26)
098.jpg
99. 소집점호시의 국립 경찰(1946)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33)
099.jpg
100. 친일경찰도표(1946.11)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상, 청사, 1986, 280)
100.jpg
101. 미소공위(1946.3, 1957.5)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30)
101.jpg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위' 절차를 토의하는 미측의 하지 중장(왼쪽)과 소측의 스티코프 중장.
102. 아이 업은 아이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58)
102.jpg
동생을 등에 엎고 사과를 파는 소녀 행상의 모습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팍팍한 삶의 현실을 볼 수 있다(1947년 10월)
103. 쌀공출(1946)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40)
103.jpg
1946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공출하는 광경.
104. 9월 총파업(1946.9)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93)
htm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9,659건 34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