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사회 지주제 - 김홍도 <벼타작> 그림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특별전 도록, 1996,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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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1745-1818:영조 21-순조18)의 풍속화첩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볏짐을 지고 오고, 통나무에 태질을 하여 벼를 털고, 갈퀴질을 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쪽에서는 마름인지 지주인지 술병을 옆에 놓고 장죽을 입에 문채 감시를 하고 있는데도 타작하는 표정들이 밝다. 봄부터 논갈고 씨뿌리고 김매다가 수확할 때, 그동안 힘들었어도 타작할 때는 신바람이 난다. 그러나 타작한 뒤 수확의 반이상을 지대로 바쳐야 하는 것이 농민들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설렁 설렁 태질을 하여 벼이삭이 붙은채로 갈퀴로 끌어 모아 북데기로 묶어놓았다가 알곡을 정액이건 분반이건 나누어 지대로 바친뒤 늦가을 다시 털어 자기몫을 늘리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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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사회 신분제 - 김득신 <노상현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3 , 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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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 종을 앞세워 나귀를 타고 나들이를 하고 있다. 상민은 허리를 땅에 닿을 만큼 굽혀 굽신거리며 양반을 대하고 있다. 조선사회 신분제의 실상을 실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이러한 지주제와 신분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조선후기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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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화도조약 (1876)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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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11일부터 2월 26일까지 강화부 서문안의 진무영에서 계속된 조선과 일본 양측 대표의 회담 그림이다.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은 최외법권인 영사재판권, 조계 설정, 무관세무역,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일본의 일방적인 특권만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을 비롯하여 인천과 원산을 차례로 개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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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오군인폭동(1882)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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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인폭동 때 일본기를 들고 인천2으로 도주하는 일본공사관원들과 발사 위협에 쫓기는 군인들 모습. 1882년 6월 군인폭동은 개항 뒤 새로 만든 신식군인인 별기군과의 차별, 민씨정권의 부패로 제때 정해진 월급을 받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이 군인들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근교에서 살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아 군대에 들어간 빈민들이기도 하였다. 군인들은 잠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내쫓았다. 일본공사관원들은 탈출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의 무력개입으로 진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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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에 파견된 해외사절(1883)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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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년 후인 조선은 1883년 7월 8일 전관대신 민영익(1860-1914) 일행을 도미사절로 파견하였다. 사진은 최초로 서양문물을 돌아보고 돌와 찍은 도미사절 일행이다. 앞줄 왼쪽부터 통역관 로우엘, 홍영식, 민역이그 서광범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은 저율이긴 하지만 관세권을 인정받았으나 미국에게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다. 그 뒤 1882년 9월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치외법권 확대, 서울 양화진 개시와 내지통상권 허용, 연안무역권 허용, 홍삼수출에 대한 고율관세(30%) 부과 등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조인하였다. 조선정부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문호를 열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깊숙이 들어앉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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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갑신정변(1884) - 김옥균(1851-1894)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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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가 지구본을 한번 돌리더니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에 중국이 어디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 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이 말을 듣고 김옥균은 크게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이것이 갑신정변 폭발의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규수와 만나 세계를 논하면서 김옥균은 중세의 동양적 세계관인 중화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적 만국공법적 세계관(이것도 서구 열강 중심의 세계관이긴 하지만)으로 인식을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중세적 조선을 정치 사회적으로 변혁하여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제도를 고쳐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 대해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상국 역할을 하던 청나라는 점차 조선을 실질적으로 소국화하려고 심하게 간섭하고 있었다. 민씨 정권은 부패하고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나라 살림을 거덜냈다. 양반지주는 소작료로 농민 생산의 5~6할을 수탈하고, 청국과 일본 상인의 횡포에 농민이나 상인의 살림은 바닥이 났다. 김옥균등 양반 지주 엘리트들은 과감한 개혁없이 이대로는 나라가 지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시하였다. 변혁은 불가피했다. 김옥균은 1851년 2월 23일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 농촌에서 안동김씨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병태는 생계를 위해 천안읍 변두리인 원대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차렸다. 옥균은 5살 때부터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7살 때 아버지의 6촌 뻘 되는 김병기(안동김씨 세도가에 줄을 대어 관직에 올라 서울 거주)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에 거주하며 김홍집과 사귀게 된다. 양아버지가 강릉부사로가자 강릉에서 6년간 이율곡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수학하다 1866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학문은 물론이고 시문 글씨 그림 음률에 탁월하여 대원군과 조대비에게까지 알려졌다. 1872년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벼슬은 총망한 젊은이에게 주어지는 홍문관 교리까지 올랐다. 김옥균이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20세 무렵인 1870년 무렵 유대치 박규수 등과 접촉하면서부터다. 이들은 김옥균, 홍영식(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 박영효(철종의 사위), 박영교(박영효의 형) 등을 지도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하였다. 김옥균등은 양반 중인 군인 상민 승려 등 신분을 초월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국왕이 새 문물, 제도에 관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국왕의 신임과 총애를 얻는 데도 성공하였다. 외교기관인 외아문에 김옥균과 홍영식은 협판으로, 변수는 주사로 있어 국왕에게 외교에 대한 상주도 할 수 있고 외국 시찰의 기회도 많아 국제정세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특히,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문명개화'의 실상을 파악하고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인 후쿠자와 유기찌의 지도와 도움을 받게되었다. 당오전 등 악화를 남발하여 재정난을 타개하려는 민씨정권에 반대하여,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개화정책을 추진할 자금난도 타결하고 정치자금도 충당하려 했으나, 민씨정권의 방해공작과 일본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개화당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한편, 청국과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약간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정권을 지키려는 민씨일파 집권세력은 일본의 명치유신적 개혁과 만국공법적 질서를 꿈꾸는 개화당 인사들을 위험시하였다. 김옥균은,우리들은 수년래 평화수단을 쓰면서 각고 진력하였지만 그 공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금일에는 이미 사지에 들어가 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선수를 써야 한다.면서 서둘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은 처음에 미국공사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이권 침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때라 별반 신통한 이익이 없을 것 같은 조선문제에는 소극적 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 일본공사에게 접근하여 일본공사관 병력을 동원하는 데 동의를 얻었다. 청국병사가 걱정이 되었으나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와 청불전쟁을 벌이고 있어 상당수의 청국 병사가 빠져나간 사태여서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1884년 12월 4일 10시 경에 우정국 북쪽의 민가에 방화한 것을 신호로 거사는 시작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우정국 개국 연회에는 외국공사들과 민씨정권의 세력가들이 이미 거나하게 취하여 희희낙낙하고 있었다. 민비의 친조카 민영익이 칼을 맞고 맨먼저 쓰러졌다.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우궁에 도착하였다. 변란의 소식을 듣고 입궐하던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이 차례로 처단되었다.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국왕에게 상주하여 신정권 수립에 착수하였다. 좌의정에 이재원, 우의정에 홍영식, 좌포도대장에 박영효, 우포도대장에 서광범, 호조참판겸 판서 서리에 김옥균, 병조참판에 서재필 등이 임명되었다. 이어서 '혁명정부'의 의도가 잘 나타난 정강 14조가 발표하여 청국과의 전통적 관계 단절,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 제정, 지조법개정(삼정문란 해결), 탐관오리 숙청, 근대적 경찰.군사제도 수립, 국왕 전제와 척족의 간섭을 배제한 내각제 수립 등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김옥균 등의 웅대한 꿈은 3일 천하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궁궐의 무기는 녹슬어 총알 한번 쏘아볼 수 없었고, 일본공사는 청군이 들이닥치자 소극적으로 저항하다가 슬그머니 철수하고 말았다. 손쉽게 청군과 민씨일파는 정권을 되찾았다. 국왕을 따르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에 피살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천세환'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다. 먼 외딴 섬 소립원도나 북해도의 벽지로 끌려가 굶주린 연금 생활 10년을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꿈꾸던 김옥균은 민씨일파의 자객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상해로 유인되어 1894 년 2월 22일 살해당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은, 밖으로는 일본이나 미국의 협조하에 청국이나 서구열강의 간섭을 배제하여 최소한이나마 자주국가를 수립하고, 안으로는 봉건적 양반지주제의 폐단을 어느정도 고치어 지주,상인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부르조아적 개혁을 단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이들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기에는 계급적,사상적 한계와 미숙성을 드러냈다. 양반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들은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이익과 관련한 개혁은 생각지도 않았고, 민중을 동원하려 하지도 안았다. 반대로 전제군주인 국왕에 매달리고, 침략세력인 일본에 의존하였다. 청병을 과소평가하는 등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였다. 중세의 말기적 폐단과 양반.상인의 수탈에 신음하고, 일본.청국 상인의 횡포에 살림이 거덜난 민중은 개혁을 열망하고 있었다. 김옥균 등의 노력에 따라 민중은 혁명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민중과의 단절은 외세의존적인 개화운동, 부르조아 개혁운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이수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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