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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4

이성호(07) 작성일 09-01-08 19:21 12,939회 1건

본문

169. 미 문화원 점거 농성(1985.5.23)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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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12시 73명의 학생들이 미 문화원 도서실 계단을 뛰어 올라, 미국을 우방이 아니라 광주 학살의 책임자로 규정하면서 72시간 농성. 이 농성을 통하여 전두환 정권에서 금기시되었던 '광주'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갔는가>라는 성명서를 통해 "우리 민주 학우는 전 한국 민중을 대표하여 미국측의 광주 민중학살 공범 여부를 묻고 군부 독재 지지 철회를 요구하고자 주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고 목적을 밝히고, 농성을 풀면서 " 1)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2) 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3) 미국은 군부 독재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3) 신민당은 국정 조사권을 발휘하라, 5) 모든 민주운동 단체들은 광주 학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합시다."라는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170. 구로노동자 연대투쟁(1985.6)
(서울노동운동연합, 선봉에서서, 돌베개,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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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양심은 절규한다." - 연대투쟁을 지지하는 22개 민주.민권운동단체 대표들이 농성중인 청계 피복 노조 사무실(85. 6. 26).
171. 애학투결성과 건대농성(1986.10)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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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건국대학교 사회과학관 옥상에서 농성중인 학생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는 전국 27개대 대학생 1천 5백여 명이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발족하였다. 경찰이 퇴로를 차단한채 강제 진압을 감행하자 학생들은 자연 건물로 피하여 농성으로 이어졌다. 10월 30일 '금강산댐'을 발표한 정부는 31일 경찰 8천여명을 투입하여 1525명을 연행하고 그 가운데 1295명을 구속했다.
172. 금강산댐 평화의 댐(1986.10-11)
(조선, 서울, 동아, 중앙, 한겨레 신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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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북괴'가 쌓으려는 "2백억톤의 물을 담은 거대한 금강산 댐이 무너질 경우...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완전히 황폐화하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기자회견을 벌였다. 이를 받은 언론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수공(물침략)'과 '물폭탄'에 대한 불안과 공포분위기를 확대하였다. 댐이 터지면 중부권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서울의 63빌딩 허리까지 찰락찰락하게 되고 국회의사당 머리까지 꼴깍꼴깍 차게 된다는 것이다.
11월들어 교장선생이 학생들을 앞에놓고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고 선동을 해도 잡아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주는 데모, 통반별로 동원되어 금강산댐 추진하는 '북괴'를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수없이 열렸다. 대응댐으로 평화의 댐을 쌓자는 성금걷기 운동이 이어졌다. 봉급에서 본인들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성금을 원천징수 하였으며, TV 카메라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으로 벙어리 저금통장까지 깨게했다. 그렇게 모금한 6백61억원의 성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그렇게 시작한 평화의 댐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떠들석하던 분위기가 곧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다시 88년 여름들어 평화의 댐 문제가 언론과 국회를 통하여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시스템공학센터는 200억톤이 아니라 150억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금강산댐을 쌓으려해도 20톤짜리 트럭 1천대가 13년 동안 흙을 퍼 날라야 하며, 그렇게 쌓은 댐에 물이 다차는 기간은 14년이 걸린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모두 27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 기간은 올림픽이 4년에 한번씩 치뤄지니까 6번 치르고도 3년이 남는 기간이다. 그런데 5공화국정권은 마치 2년뒤의 88올림픽을 치르지 못할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부가 1986년 10월 30일 훨씬 이전인 봄부터 북한이 금강산 댐 건설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0월 30일에 발표를 했을까. 그 해 봄부터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8일에는 전국 26개대학의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가졌다. 5공화국정권으로서는 대학생들이 대립되는 가장 거추장스런 세력이었다. 경찰이 투입되어 빠져 나갈 구멍을 남기지 않고 밀어부치자 학생들은 모두 건물로 밀려들어갔다. 10월 29일 검찰은 학생들을 전원 연행 구속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겨레신문} 조차 없던 그 시절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건대사태'를 과장 왜곡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TV에서는 검붉고 푸르죽죽한 화면에 '광광광'하는 음산한 배경음악을 깔고 건대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비춰댔다. 다음날, 금강산 댐 사건을 발표하였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속에서 '북괴는 물침략까지 준비하는데 철딱서니 없는 학생놈들이 무얼 안다고, 다 잡아들여!'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다음날 10월 31일, 헬기까지 동원한 상태에서 경찰 8500여명이 건대에 들어가 학생들 1500여명을 굴비엮듯이 연행하였다. 왜 금강산댐에 대해 발표한 10월 30일이 29일과 31일 사이였던가.
관제데모가 곳곳에서 벌어지던 11월에는 당시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였던 '민통련'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고,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종철군도 잡혀들어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고문치사를 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선전.탄압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며, 민주화운동과 '애학투', '물침략'과 '물고문'은 무관하지 않으며, 다음해 급박하게 치달은 '4.13호헌 조치'와 6월항쟁도 내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댐 평화의 댐 사건을 1986년 10월이나 11월의 시점에서 정부가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연관되는 다른 사건이나 전체의 시대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는 시간의 긴 흐름 선상에서 어느 때인가, 전후 사정은 어떠한가, 다른 사건이나 인물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사회의 모순 그리고 사회의 모순구조에서 형성되는 대립되는 양대세력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역사적 과제 해결 방향에 합치하는가 역류하는가 등을 종합적.총체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한 평가를 우리는 역사적 평가라고 한다.
17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1)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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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2월 3일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규탄시위 장면.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배를 받고 있던 친구의 소재를 추궁당하다가 수사실에 딸린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해 11시 20분경 숨졌다. 그러나 1월 15일 저녁 경찰의 공식 발표는 조사 결찰관이 '탁'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물고문 혐의가 밝혀져 고문경관 두 명이 구속되고 내무장관, 치안본부장이 경질되었다. 세인의 기억이 희미해지던 5월 천주교 사제단의 폭로로 범인 축소 조작 사실이 밝혀져 경찰 간부 세명이 추가 구속되고 국무총리와 안기부장, 내무.법무장관이 포함된 개각이 단행되었다. 검찰총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전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74. 학우여! - 이한열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표지) 정태원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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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경,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내고 정문 앞에서 1천여명의 학생들과 경찰이 동시에 화염병, 돌멩이, 최루탄이 오가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한열(연세대 경영학과 2년)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코와 입에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버린 이한열군과 마스크를 쓴 채 그를 붙잡고 분노의 눈길로 진압경찰을 바라보는 학생. 이 한 장의 사진은 6.10항쟁의 기폭제가 된 상징적인 사진이 되었다.
175. 6월항쟁 1- 명동성당 농성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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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간선제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날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군 고문 살인 규탄 및 호헌 철폐 시민대회가 열렸다. 서울의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하였다.
6월 18일 전국에서 최루탄 추방대회.
176. 6월항쟁 2
(마리오 암브로지우스, 분단한국, 열화당, 1989) 김경수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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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도 화염병을 들고 시위에 참가.
177. 6월항쟁 3 - 최루탄을 쏘지 마라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15)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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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동 4거리에서 8천여 시위군중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찰이 다탄두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하자 군중 속에서 갑자기 대평 태극기가 펼쳐지고 그 태극기 앞에 위통을 벗어 던진 청년이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아스팔트를 달렸다. 그 청년의 절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국가 공권력,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오류와 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양심의 상징 같았으며, 이 사회의 폭력, 탐욕, 무지, 저속, 잔인, 부정에 대해서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178. 6월항쟁 4 - 6.29 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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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오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제 수용 선언을 보도한 신문 호외를 읽고 있는 시민. 1987년 6월 29일 오전 9시5분, 서울 관훈동 집권 민정당사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의 사면.복권, 지자제 실시, 언룬자유 보장 ... 등 6.29 민주화 선언 8개항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고 하였다. 노태우는 6.29 선언이 자신의 '고독한 결단'에 의해 나온 것이라 하였으나, 노태우.전두환의 사전협의에 의한 것이었다. 6.29선언은 6월항쟁의 획득물이라는 측면과 지배블록의 '예방혁명' 조처라는 측면이 포함되어있다.
179. 7.8.9 노동자투쟁 1 - 길을 메운 현대 노동자들
(사회사진연구소, 답하라 전세계노동자, 새길, 1991,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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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7.8.9 노동자투쟁 2 - 이석규 장례 행렬
(한길사,한국사-20, 1994,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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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장례행렬, 1987년 8월 22일.
181. 7.8.9 노동자투쟁 3 - 왜곡광고
(한국일보, 1987.8.18, 하단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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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8.9 노동자 투쟁이 한창이던 8월 18일 한국일보에 실린 광고. '당파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파싸움을 끌어들이고, 고용주는 부모, 근로자는 자식같는 존재이므로 고용주는 종업원을 자식으로 대하고 종업원은 고용주를 부모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적인 봉건주의 논리를 펴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하는 선전이다.
'노사분규?'
지금 이시간에도 외화획득의 귀중한 시간이 소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나친 노사간의 마찰은 온 국민의 바램을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당파싸움 속에 온백성이 꿂주렸던 이조말기- 가난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받아 36년간이란 긴세월을 나라잃은 설움에 울어야 했던 눈물겹고 슬픈 현실을 우리는 가슴속깊이 되새기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먹을 것 못먹고, 입을 것 못입고, 놀것 못놀고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였던가요.
고용주는 가정으로 치면 부모가 아닙니까? 부모는 자기가 먹고 싶은것을 참고 때로는 굶주려가면서도 자식에게 만큼은 잘 먹이려고하는 숭고한 마음을 갖고 있읍니다. 부모가 사치하고 허영에 들떠있다면 어느 자식이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하겠읍니까?
또, 근로자는 가정으로 치면 자식이 아닙니까? 자식된 도리로 부모에게 대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읍니까? 우리 모두 어디 불평불만이 없겠읍니까? 국제경쟁이 높아진 지금 대의신용을 지키지 못하면 우린 또다시 경제대국들에 의해 식민지가 될수밖에 없읍니다. 우선 일을 하면서 노사간에 대화로서 해결토록 합시다.
지나친 노사간의 마찰은 온국민의 바램을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고용주는 종업원을 자식으로 대하고 종업원은 고용주를 부모처럼 생각하면서 대화한다면 5천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민족의 멋진 모습을 또한번 세계에 과시할 수 있을 겁니다.
182. 대선 벽보
(마리오 암브로지우스, 분단한국, 열화당, 1989,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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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재야계보도
(한겨레신문, 199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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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재야운동이 전국규모의 공개조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김근태씨가 청년운동단체로 결성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었다. 이후 이부영씨 등이 1984년 조직한 민중민주협의회가 나타났다가 1985년 모든 재야세력을 망라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내세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재야와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범국민적인 조직으로 결성돼 직선제 헌법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재야는 후보단일화파와 비판적 지지파, 독자후보추대파로 나뉘었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세웠던 임채정 이길재 이해찬 등은 평민연을 거쳐 88년 평민단에 입당하여 13대 총선에서 제도정치권으로 편입하였고, 후보단일화파 가운데 일부는 한겨레당(공동대표 제정구)으로 제도정치의 문을 두드렸고, 독자후보파의 소장세력을 중심으로 일부 그룹이 민중의당(대표 정태윤)을 결성해 총선에 출마했다. 1988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결성돼 민통련의 법통을 이었다. 같은해 정당추진을 준비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탈퇴해 11월 장기표 등이 중심이돼 진보정당준비모임을 결성했다가 1990년 3월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로 이부영 장기표 제정구 등이 모여 정당화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또한 제도야당과 어떻게 관계를 정립할 것인가 순서를 둘러싸고 '선통합'과 '선창당'으로 나뉘었다. 이부영 제정구 유인태 등 선통합파는 야권통합을 주장하며 '범민주통합수권정당추진회의'(통추회의)를 추진하나 실패한 뒤 이부영 유인태는 민주연합을 거쳐 이기택 총재의 옛 민주당과 합당하고 제정구는 민-민주당 통합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장기표 이재오 조춘구 등 선창당파는 민중당을 창당해 민중노선을 내세우며 14대 총선에 나섰으나 다시 패배를 겪었다. 1992년에는 전노협 전교조 등 부문운동단체들이 전민련과 함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결성하였다.
184. 88 통일운동
(한길사,한국사-20, 199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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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팔짱을 낀 채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 1988년 6월 홍제동.
185. 88 노동법개정투쟁 (1988.11.13)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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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1987년 7.8.9 치열했던 노동자파업투쟁을 집중시켜 5만여명의 전국 노동자대중이 결집, 6.25전쟁 이후 최대의 노동자대회가 이루어졌다. 여의도까지 행진하여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폐촉구대회]를,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다.
186. 88 농민투쟁(88.11.17)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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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31일 한국 가톨릭 농민회, 한국 기독교 농민회 총연합 등 13단체, 농업 부분별 생산자 단체가 연합, '전국 농민단체 협의회'를 결성하고 '전농협' 주최로 11월 17일 여의도 광장에서 '농축산물 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를 벌였다.
187. 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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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백담사 은둔 1주년을 맞아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및 봉헌법회에서 불경을 외우고 있는 모습.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물었다. 백담사 생활을 한지 1년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1996년 구속되기전 연희동 골목에서 그의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기자회견을 할 때 그 살벌한 표정을 보면 절 생활 25개월은 별무효과.
188. 전교조결성(1989.5.28)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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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전국교원노동조합 발대식.
1986년 5월부터 시작한 교육민주화선언은 7월까지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교육문제를 국민 앞에 전면적으로 부각시켰고, 87년 6월항쟁 이후 교육민주화운동역량은 9월 27일 [전국교사협의회]로 결집되었다. 전교협은 창립이후 {전국교사신문}을 비롯해 지역별 교사신문을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강화하였고, 87년 하반기부터 교육악법개정운동을 벌여 서명운동, 집회 등을 통하여 교육관계법상의 독소조항을 부각시켰다. 1988년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전교협은 3만8천6백43명이 서명한 교육법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하였다. 이러한 열기는 11월 20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참교육 실천을 위한 전국교사대회'로 모아졌다. 전교협은 12월 전국임원연수에서 교직원노조를 건설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후 전국대의원대회 결의와 시도별 결의대회, 89년 5월 14일 1만 5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비위를 결성하고 전국교직원노조발기인대회를 거쳐 5월 28일 결성하였다. 갖은 탄압을 뚫고 연세대에 모인 1천 5백여 명의 교사들은 '전교조 깃발 아래 참교육 쟁취하자'는 함성속에 연세대에서 전교조 발대식을 열었따다. 결성선언문에서 전교조는 '민족.민주.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운동을 더둑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189. 3당합당 선언(1990.1.22)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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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이 22일 저녁 3자회담을 마치고 청와대 접견실에서 두 김 총재와 자리를 함께한 가운데 민정.민주.공화 합당을 선언했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긴급회담을 갖은 노태우 대통령은 민정.민주.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당명칭은 민주자유당(가칭)으로 하기로 했다. 신당은 우리 헌정사상 계엄령이나 쿠테타 등 물리적 강제없이 집권당과 전통야당의 일부가 결합하는 최초이 사례가 되었으나, 내각제 중심의 개헌을 통한 권력배분을 전제로 합당을 선언하여 여소야대를 만들어준 국민의 주권을 짓밝고, 6공화국 정권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3당은 통합하여 2월 9일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의 합당은 4당 구조로는 앞으로 집권 연장이나 권력배분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축소될 것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세 정당이 안정적인 권력분점체제를 구축하려는 데 있었다. 또한 기층민중운동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에 위기감을 느끼고 보수대연합을 통해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전노협 결성일 3당 합당을 선언한 것이 그러한 의도를 바로 보여준다.
190. 전노협 결성(1990.1.22)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 준비모임, 창당소식 3, 199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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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2일 낮 12시 40분 경기도 수원의 성균관대 자연과학대캠퍼스 강당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 단병호씨가 '전노협출범'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전노협은 이날 대회 예정장소인 서울대가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되자 대회장소를 수원으로 바꿔 전국에서 모인 노조 대의원 4백여명과 학생 재야인사 등 6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습적인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위원장에 단병호(41)씨를 선출했다. 전노협은 이날 창립선언문을 통해 " 이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사회.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됐다"고 선언하고 "전노협으로 결집한 우리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기본권을 쟁취함으로써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노협은 직종, 남녀, 학력간 차별임금 철폐, 고용안정 보장제도 쟁취,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안전한 작업환경 확보, 노동 3권의 완전한 쟁취,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철폐 등 12개 항의 강령을 채택했다.
전노협은 전국 14개 지역노조협의회와 2개 업종노조협의회에 속한 6백여개 단위노조 조합원 20여만명이 전노협에 가입했으며 전국교직원노조, 전문기술노련, 화물운송연맹이 참관조직으로 참가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대회 시작 직후인 오후 1시께 5개 중대 7백여명을 학교안에 투입, 대회장 주변을 봉쇄한 데 이어 대회가 끝난 1시 40분께 대회장으로 들어가 모두 1백34명을 연행했다.
전노협 창립선언문
우리는 오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깃발을 높이 들어 이 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노동자가 이제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비인간적인 생활조건과 정치적 무권리 속에서 노예적인 생활을 강요당해 왔던가. 그러나 보라!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일어서서 힘차게 진군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전국적 대오를!
우리 노동자는 생산의 직접적인 담당자로서 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역사를 발전시켜온 주체이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와 전민중의 인간다움 삶을 쟁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줄기차게 노동운동을 전개해 왔다. 저 멀리 선배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과 70년대 이후 민주노동운동이 발전, 그리고 장엄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계승하여 우리는 오늘 민주노조의 전국연대 조직, 전노협의 깃발을 힘차게 일으켜 세웠다.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영구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투쟁을 가로막았던 자본가와 국가권력의 온갖 탄압과 회유를 분쇄하고, 우리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광산에서 거리에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해 왔다. 단위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투쟁 속에서 '지노협'과 '업종협'을 결성하였으며 마침내 지역과 업종을 뛰어넘어 전노협으로 결집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사회.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통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전노협의 건설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비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밝힌다. 우리는 또한 정권과 소수 재벌의 억압과 수탈을 제거하여 4천만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제민주세력과 힘차게 연대해나갈 수 있는 전국노동자의 조직적 대오가 출범하였음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전국노동자의 단결의 구심인 전노협으로 결집한 우리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기본권을 쟁취함으로써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우리는 광범한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실현을 위한 투쟁으로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우리의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기초 위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 자주화,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제민주세력과 굳게 연대하여 투쟁해나갈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민주노동운동의 조직역량을 확대강화하는 한편 업종별.산업별 공동투쟁과 통일투쟁을 발전시키는 속에서 기업별 노조체계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산별노조의 전국중앙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총매진할 것이다.
우리는 전진을 가로막는 자본과 권력의 탄압과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우리는 키필코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투쟁은 정의로운 것이며, 제민주세력을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우리의 나아갈 길이 역사의 발전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억압과 굴종의 세월, 어용과 비민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전노협의 깃발 아래 강철같이 단결하여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향해 힘차게 진군하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만세!
노동운동 만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0년 1월 22일
191. 철거되는 레닌 동상
(월간 말, 199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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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에 의해 철거되는 레닌 동상.
1991년 8월 29일, 소련최고회의는 소련 전역에서 공산당활동을 정지시키는 결의안을 찬성 283, 반대 29, 기권 52표로 통과시켰다. "당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지 않으면 안된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훌륭한 모든 분자들, 그들의 경험, 그들의 혁명적 정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헌신성을 흡수해야만 한다. 당이 진정으로 전위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당은 혁명적 이론으로, 운동의 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혁명의 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레닌주의의 기초])는 소련공산당이 해체되었다
192. 김영삼 대통령 당선(1992.12)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199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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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3당합당 이후 꼬박 2년이 지난 92년 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중학생 때부터의 꿈을 이룬 김영삼이 민자당사로 향하고 있다.
193.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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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5.1세계노동절 기념집회,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104주년 노동절 집회를 열었다. 노동절을 없앤지 35년 만에 처음으로 허용된 집회였다.
194. 원진레이온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31) 동아일보 김동철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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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내부, 높은 습도와 온도, 쇠가 녹는 현장, 쇠부속품은 썩어가고 나무에 양초를 먹여야 하는 내부, 방독면을 쓰지 않고는 근무할 수 없는 방사과의 작업장 모습.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송두리채 파괴하는 살인적 독가스 이황화탄소가 유령처럼 배회하는 국내유일의 인견사 생산업체, 경기도 미금시 도봉동 윈진레이온 공장. 한국전력에서 "지독한 이황화탄소의 독성 때문에 2만볼트 고압선의 수명이 보통 20년이나 원진레이온 공장 앞 도농역의 고압선은 1년에 한 번씩 교체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1959년 화신재벌의 박흥식은 일본의 공해산업 가운데 하나였던 인견사공장설비를 싼값으에 국내로 이전해왔다. 더욱이 이 기계는 이미 20년 이상이나 사용한 낡은 기계였다. 이 공장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짧은 생애를 에두르고 남을 길고 긴 실을 뽑느라 이황화탄소를 산소처럼 호흡하며 청춘을 바쳐 일했다. 그러나 이들은 돈에 눈이 어둔 회사와 우리 사회의 무관심 속에 이황화탄소중독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다. 한편 직업병예방에 치중해야 할 노동부는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에게 두가지 이상 중독의 증이 발견되어야만 직업병으로 판정하는 직업병 인정기준을 적용해 치료가 불가능한 '닫힌 문'에 들어서기를 강요해왔다. 원진레이온은 1993년 6월 폐쇄결정이 났으며, 1993년 8월까지 이황화탄소 중독과 관련해서 사망한 사람은 15명, 노동부로부터 직업병으로 판정받아 병상에서 신음하는 환자가 2백57명에 이르고 있다. 원진레이온의 법정관리를 맡고 있는 산업은행은 1993년 7월 10일 정부방침대로 폐업해 기계를 멈추었다. 그러나 이회사를 마지막까지 지켜온 8백여 노동자들은 아직도 멈춘 기계를 붙들고 공장 안팎에서 직업병대책과 생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의 이회사를 퇴사했던 노동자는 줄잡아 1만3천여명에 이르고 있다.
195.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농민 시위
(중앙일보, 199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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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1일 전주 다가공원에서 열린 '쌀개방반대결의대회'에서 한 여성이 '우리쌀을 애용하자'는 내용의 피킷을 두손으로 번쩍 치켜든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농민들의 반대에도 정부는 12월 5일 '쌀시장 개방'을 발표했고, 정부의 무책임한 농정을 질타하는 농민과 사회단체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이어졌다.
196. 삼풍백화점 붕괴(1995.6.29)
(중앙일보, 199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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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5층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큰 기둥 양쪽에 남아있는 벽 사이 지하 복판에 시멘트 기둥 조각 철근 등이 뒤엉켜 있고, 밑바닥에는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무너지기 전 조짐을 발견하고도 돈벌이에 눈이 멀었던 자본가의 추악함도 드러났다. 이 참사로 5백 1명이 숨지고 9백 37명이 다쳐 한국전쟁 이후 단일사건.사고로는 최대의 인명피해를 냈다. 그러나 참사 속에서도 수많은 자원 봉사자와 119구조대가 구조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해 4월 27일에는 대구 도심 한복판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폴발해 1백 1명이 숨지고 수억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이후 불과 6개월 만에 또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는 대구백화점 상인점 신축공사 하청업체인 표준개발이 천공 작업을 벌이다 지름 1백mm의 가스관을 파손시켜 새나온 도시가스가 70미터 가량 떨어진 지하철 공사장에 고여 있다가 폭발한 것이다. 정부는 사고 직후 각종 안전관리 대책을 내놓았지만 두달 뒤 다시 삼풍백화점이 무너짐으로 헛된 공약이 되고 말았다.
197. 5.18 학살자 처벌과 특별법제정 운동(1995.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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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집권한 신군부를 단죄하기 위한 특별법이 1995년 12월 19일 제정되었다. 광주문제는 95년 7월 검찰이 5.18관련자 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으로써 역사의 몫으로 넘겨지는 듯 했다. 그러나 7월 31일 고려대 교수들의 시국성명을 시작으로 학계 종교계 사회단체 등의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지면서 특별법 제정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적 요구에 밀려 11월 24일 특별법을 제정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특별법 제정과 함께 1995년은 학살자 처단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 두 전직 대통령을 국민과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대에 세운 해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보유설'을 계기로 검찰은 11월 16일 노씨를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했다. 이어 검찰은 12.12 쿠테타 세력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하여 12월 3일에는 노씨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 수괴 등 6개 혐의로 안양교도소에 수감하였다.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이후 16년 만에 그 주역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198. 민주노총 창립(199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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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출범하여 3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복수노총 시대가 열렸다. 재야 15개 산업별(업종) 조직과 8백 61개 노조 조합원 41만 8천 154명이 가입하였다. 민주노총은 조직력과 주요사업장 장악력에서 한국노총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정부는 민주노총 설립 신고서를 반려하고 권영길 초대위원장을 구속하는 등 강경 대응으로 치달았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의 주체, 역사발전이 원동력인 우리들 노동자는 오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을 벅찬 가슴으로 선언한다.
저 멀리 선배 노동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탄압 속에서 민족해방과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위해 피어린 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우리 노동자들은 독재 정권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민주노조를 지켜왔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 2000여명에 이르는 구속자와 5000여명이 넘는 해고자를 낳는 등 온갖 탄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조직을 확대 발전시켜 왔으며, 전국적 공동임투와 노동법 개정투쟁, 사회개혁 투쟁 등을 전개하면서 통일 단결을 강화해 왔다.
이에 우리는, 빛나는 투쟁의 전통과 통일 단결된 힘을 기초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을 결성한다.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우리는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조건의 확보,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 산업재해 추방과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더욱 가열차게 투쟁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함과 더불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국경을 넘어서서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하고 침략전쟁과 핵무기 종식을 통한 세계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와 조직의 확대.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산업별 공동투쟁과 통일투쟁에 기초하여 산업별 노조체제의 견결한 투쟁대오를 갖춘 전국중앙조직으로 발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주성과 조합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의 통일 단결을 위해 매진할 것이며, 제민주세력과 연대하여 정치세력화를 실현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어떠한 탄압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 건설의 그 날까지 힘차게 전진하자!
- 95년 11월 11일
199. 민주노총 창립 노동자대회 (199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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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대의원 대회를 통하여 민주노총 창립을 선언하고 저녁에는 노천강당에서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다음날 12일 민주노총은 연세대에서 여의도까지 행진하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노동자 대회를 열었다.
200. 내릴 수 없는 깃발이여!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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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이어지는 해방 사회로 가는 길은 잘 닦여진 탄탄대로가 아니며, 가득한 안개 속에서처럼 전망이 뚜렷하지도 않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은 그 시대의 자기 모순을 해결하면서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켜나가는 과정이다. 없어야 할 것은 없애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드는 파괴와 창조, 노동과 투쟁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좋은 사회, 해방 공동체를 향한 깃발을 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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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웅(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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