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며..
이성호(07)
작성일
09-02-20 10:35 9,7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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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떠나 이 시대의 큰 어른/큰 스승으로서 존경 받을 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발자취를...!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은 그레고리안 성가도 좋아하셨지만, 김수희의 애모도 부를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이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 /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김 추기경이 남긴 어록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성경 시편 51장. 1951년 9월15일 서품식에 입을 사제복에 사제 생활의 모토로 삼을 성구를 골라 새긴 문구)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951년 9월15일 사제 서품식 때 제단 앞에 부복했을 때 한 기도)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 2년 전 주교품을 받을 때 정한 사목 표어 '여러분과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되새겨 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인 현실 참여는 어떻게든 실천해야 하며 서울 대교구가 한국 일반 정서에 비춰 지방교회에 봉사하는 교구가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가톨릭 시보와 가진 5월5일자 인터뷰)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968년 5월29일 명동대성당 교구장좌 착좌식 취임 미사 강론에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1972년 10월17일 회의차 이탈리아 로마에 머물다 유신 개헌 소식을 듣고 로마 주재 한국대사에게)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밖에 없지 않습니까." (19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말리던 가운데 나온 말)
▲"주여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도 재지 않겠습니다. 그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저를 받아 주소서.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있는 그대로 당신께 맡깁니다." (1979년 2월13일 피정 마지막 날의 일기)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1979년 11월3일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한 기도)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1980년 설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교회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 (1989년 7월 1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중에서)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폐지를 주장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다면 남의 생명도 그렇게 인정을 해야겠지요."(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신년 특별대담 중 낙태를 비판하며)
▲"그럼 사는 길은 제가 볼 때는 자기를 여는 겁니다. 그것만이 북한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되고요. 그래서 북한이 정말 필요한건 지금 미국이라든지 일본하고 수교를 하는거라고 봅니다."(북한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이듬해인 1994년 평화방송 신년대담에서 북한 핵문제 청산과 개방, 북한과 미국,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이야기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또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 정말 목자로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고 또 의무입니다. 사실은... 가봐야하는게 의무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1998년 평화방송 신년대담 중 방북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웃음)"(2003년 11월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면 두툼한 쪽으로 더 가요. ‘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나는 두툼한 데 손이 더 가요. (웃음) 그리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2005년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세계 앞에 한국이, 한국 사람들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에요. (한참을 우심) 하느님이, 평소에 느꼈지만 하느님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너무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 그렇게 했으니... (눈물)"(2005. 12.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 평화방송 평화신문 성탄 특별대담에서)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성경 시편 51장. 1951년 9월15일 서품식에 입을 사제복에 사제 생활의 모토로 삼을 성구를 골라 새긴 문구)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951년 9월15일 사제 서품식 때 제단 앞에 부복했을 때 한 기도)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 2년 전 주교품을 받을 때 정한 사목 표어 '여러분과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되새겨 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인 현실 참여는 어떻게든 실천해야 하며 서울 대교구가 한국 일반 정서에 비춰 지방교회에 봉사하는 교구가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가톨릭 시보와 가진 5월5일자 인터뷰)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968년 5월29일 명동대성당 교구장좌 착좌식 취임 미사 강론에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1972년 10월17일 회의차 이탈리아 로마에 머물다 유신 개헌 소식을 듣고 로마 주재 한국대사에게)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밖에 없지 않습니까." (19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말리던 가운데 나온 말)
▲"주여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도 재지 않겠습니다. 그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저를 받아 주소서.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있는 그대로 당신께 맡깁니다." (1979년 2월13일 피정 마지막 날의 일기)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1979년 11월3일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한 기도)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1980년 설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교회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 (1989년 7월 1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중에서)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폐지를 주장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다면 남의 생명도 그렇게 인정을 해야겠지요."(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신년 특별대담 중 낙태를 비판하며)
▲"그럼 사는 길은 제가 볼 때는 자기를 여는 겁니다. 그것만이 북한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되고요. 그래서 북한이 정말 필요한건 지금 미국이라든지 일본하고 수교를 하는거라고 봅니다."(북한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이듬해인 1994년 평화방송 신년대담에서 북한 핵문제 청산과 개방, 북한과 미국,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이야기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또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 정말 목자로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고 또 의무입니다. 사실은... 가봐야하는게 의무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1998년 평화방송 신년대담 중 방북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웃음)"(2003년 11월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면 두툼한 쪽으로 더 가요. ‘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나는 두툼한 데 손이 더 가요. (웃음) 그리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2005년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세계 앞에 한국이, 한국 사람들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에요. (한참을 우심) 하느님이, 평소에 느꼈지만 하느님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너무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 그렇게 했으니... (눈물)"(2005. 12.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 평화방송 평화신문 성탄 특별대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