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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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 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 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그녀는 동성애자, 세자빈 봉씨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조선의 신데렐라, 백정의 딸 양씨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당대의 로맨스, 홍랑과 김기창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조선시대 최대 섹스 스캔들, 어리사건
양녕은 폐세자가 된 후 숨을 거두기까지 수많은 기행을 일삼았는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복잡한 여자관계였다. 그중 상왕의 시첩 초궁장과의 스캔들은 그녀의 신분이 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사건을 무마시키고 눈 감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었지만 곽선의 첩 어리와의 스캔들은 세자의 신분으로 감행된 유부녀와의 간통이라는 점에서 왕실의 자존심을 땅에 떨어뜨리는 큰 죄였다.
당시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었던 어리는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양녕은 어리가 서울 친척집에 오자 좋은 기회라고 여겨 그 친척을 통해 선물을 보내지만 어리는 이미 남의 부인인지라 그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달아오른 양녕은 곽선의 양자를 위협해 다짜고짜로 어리를 납치해 동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에 의해 어리는 무사 방면됐지만 양녕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어리에 대한 마음을 접을 길 없었던 양녕은 대하사극 ‘대왕세종’에서 그려진 것처럼 장인 김한로의 집에 어리를 숨겨두고 태종 몰래 그녀를 만나 아이까지 낳게 한다.
때마침 태종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자 큰 슬픔에 잠겨있던 차에 양녕의 이같은 기행이 다시 한번 태종의 귀에 들어가면서 세자 폐위란 초유의 사태로 이어진다. 처음 태종은 양녕의 장인 김한로를 나주로 유배했다 사사하고 세자를 두둔하던 영의정 황희(黃喜)는 남원으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양녕이 태종에게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고, 또 여자들을 무시로 궁에 출입시키면서 왜 세자궁에 여자를 들이는 것은 금하십니까?’라는 글을 올리는 등 뉘우침 없이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려하자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았으며, 동궁의 문지기와 내시들은 모조리 목을 치고 양녕의 세자 폐위를 단행한다.
세자에서 폐위된 양녕은 경기도 광주로, 다시 이천으로 유배되지만 어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이 거부당하자 지키는 군사들 몰래 담을 타넘어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군졸들이 어리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고, 그 와중에 어리는 강압에 못이겨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비관하며 스스로 목매 죽어버렸다. 세자 폐위로까지 치달은 조선 최대의 스캔들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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