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알기..구강서원편~~
본문
<구강서원>
구강서원은 조선시대 울산지방의 최초 사립교육기관으로 서기 1659년(효종 10년 2월9일)에 사림배두첨외 11명이 창건 발의가 있은 후 3차에 걸처 사림 55명이 공동출자하여 1678년(숙종4년)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1동 290번지일원(서원부락)에 건원하였다.
서기1679년(숙종5년)에 울산 유학의 연원인 포은 정몽주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서기 1694년(숙종20년)구강서원이라는 사액(왕의교지)를 받아 약200여년동안 강학과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서기1871년(고종8년)에 훼철되었다.
훼철된 후 구터는 주거지로 변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든 향내 뜻있는 유림이 서원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현복원 서원부지(반구동 산 171-1)800여평을 매입 울산광역시에 기부 채납하였다.
본 서원의 복원사업은 울산광역시에서 사업비 21억원을 중구청에 영달하여 서기2001년 3월에 착공하여 서기 2003년 2월에 준공되었다.
서원의 기능은 강학, 교화, 제사의 기능으로써 조선시대선비를 양성하던 곳으로서 복원규모는 묘우7평, 내삼문3평, 강당25평 문루13평, 고직사11평, 전사층 3평 5합이다.
<구강서원사적>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교화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로서 서원이야말로 명실상부한 향촌사림의 활동장이 되였다
이곳 울산도 서기 1659년(효종10년, 기해)1월 9일 향교춘기석전 후 사림 배두첨, 이기,이정의,김중남,이익, 배두원,안세경,이동영,김중태,이제한,전홍철, 등 당시 울산을 대표했던 사림11명에 의하여 건원 발의로 동년 2월 17일 향교에서 제회 서원건립에 소요되는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 자발적인 출물을 결의 조와 전을 1차로 배두첨,배두원,안상경,김중태,이동영,배두수,이명,전홍철,이협,이기,이정의,이시,이제한,이시찬,이익, 박창조,안일경 등 17명이 조 151석,전 1,060량을 출자하였고,2차는 서기 1664년(현종5년,갑진) 3월 9일에는 안세경,박홍조,김서장,이정한,박세도,김세진,배석우,이시,이정인,박세현,이정례,이정지,이장엄 등 13명이 조 108석,전 730량을 출자하였으며 3차는 서기 1666년(현종 7년,병년) 2월 13일 이규,윤임중,김중만,윤임성, 박흥조,김이흥,안수경,박신조,김중석,이정신,이시강,이선도,이문좌,이신,이이상,김나한,이이개,박봉조, 황도행,장니,이주한,서처일,손덕주,서상일,서준일 등 25명이 조 231석,전 1840량을 출자 모두 조 490석, 전 3650량이었다
향중 사림의 공동출자를 기초로하여 원위전답 매입 담배,소금,명태등의 무역을 통하여 서원건립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부지선정의 어려움과 창건을 방해하는 두차례의 방화와 한재로 인해 출자미는 진휼미로 탕진되었다.선대유림 55인이 물심진력하여 19년간의 각고 끝에 서기 1678년(숙종4년.무년)에 창건을 완료하고 그 다음해 숙종5년 기미에 문충공 포은 정선생과 문원공 회제 이선생을 봉안하였다.
숙종의 탕평책과 문체반정의 정책 가운데서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첩설서원은 훼철됨에 본원도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한재 진휼과 거금으로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는 등 향촌사회에 기여한 일로 훼철은 면하였다. 그 수급의 희생으로 소수는 적거되고,,5만량의 출자금도 부족하여 1300량의 빚이되어 원답 207두락을 팔아서 갚았다. 세차례의 청액상소는 무위로 끝나고 다행히 정국은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여 서기 1694년 3월 3일 네 번째 청액에서 구강,오산,학잠 중동월 9일에 구강으로 특위사액되었다.
남은 원답은 전 20두락,답 126두락 이었으니 그 많던 원재가 반동자에 의해 회진되고 오리들의 뇌물로 소요 되었으니 참으로 창건은 쉽지가 않았다. 울산은 도이의 침탈이 심했고, 관가에서는 해읍을 멸시하였으니 그것은 출사자가 희소했기 때문이다.그러하고 보니 본향유학의 연원인 인읍의의 양현을 첨설할수 밖에 없었다. 창원발의가 효종 십년 기해이니 20년 뒤인 숙종 4년 무오에 비로서 창건이 완료되고 17년 뒤인 동왕 20년 갑술 3월 9일에야 울산도호부의 숙원인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으로 열읍과 대등하게 된것이다.
특히 영조 11년 3월에는 부사 권상일 부임하여 구강서원을 크게 중수하고 묘호를 숭도,강당을 지선으로 외삼문을 유의라 명명하였다. 이후로 문풍이 정제되어 상사(진사)박망구,사인 이현담,이원담으로 하여금 학성지를 편찬하였다. 영조이후 서원은 더욱 난립하여 색파와 붕당은 서원중심으로 횡행하여 전국 47개의 사원을 제외하고는 훼철되니, 본원도 200년간 면면히 양선생을 봉향하고 문풍을 숭상하여 오다가 불행하게도 서기 1871년 (고종8년 신미)에 국령으로 훼철을 당하였고 양현의 위패는 마을 뒷산에 매안하였다.
매안 후 왜정시는 분향이 꺼졌다가 광복후 마을 주민이 매년 중구일에 제향을 하였다. 그러든 중 1988년 21월 마을 향인회가 위패를 매안한 반구동 290의 2번지 일원을 매각한다는 소식을 인지하고 동년 12월 16일 구강서원 복원 추진회를 결성하고 보은 선생 종약원과 회제 선생 숭모회 동민중 보존을 주장한 정운조,김윤준 등이 3년 돈안 구터를 보전코자 법률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소송비용만 탕진한채 허사로 끝났으니 매안된 위패는 1991년 11월 4일 울산향교 서무에 일시 이안하였다.
소송에 패한 복원 추진회는 서기 1994년 3월 18일 조직을 확대 재정비하여 서원복원의 당위성을 관련당국과 각 언론사에 홍보함과 동시 복원취지문,건의문,구강서원 원록,고주록을 발송하였다. 이에 큰 영향을 입어 서기 1995년과 96년에 중구 반구2동산 171-1 임야 803평을 매입한 뒤 복원추진회고도익,박주복,정기윤,김석환,심근식,이세걸 등은 울산시장(심완구)과 시의회(의장:오해룡)를 방문하여복원의 당위성을 건의한 결과,복원사업을 계획하게 되어 예정부지 171-1번지와 중구청에서 매입한 172-1번지 403평을 성적지로 결정고시하고, 서기 1997년 6월 27일 부터 7월 6일 까지 매장문화재 기초조사후동년 12월 5일 기본설계를 거쳐 이듬해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복원추진회는 171-1번지 803평을 울산광역시에 기부채납하여 사업실시를 기대하였으나 1998년과 1999년에 닥친 금융통화위기로 사업이 순연되었다.
서기 2000년도와 2001년도 울산광역시 당초예산에 21억8천만원이 확정,중구청에 영달되어(2차례의 기본설계를 변경을 마친후) 계속사업으로써 12월에 시공사(일토종합건설),감리사(대흥종합엔지니어링)가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2001년 3월2일에 중구청장(전나명)과 유림 57명이 참석하여 개막고유를 하였으며, 그해 9월15일에 사당 상량식에는 중구청장외 41명의 유림과 지역인사가 함께 기쁨을 나누었고, 고유문과 상량문은 풍산 유용우씨가 찬하였다.
공사는 순조로워 서기 2003년 3월15일 준공되니,본 서원의 규모는 부지 1,200여평에 건물은 전통적 양식에 맞추어 사당 7평,강당 24평합,전사청 3평5합,내삼문 3평,문루 12평5합,고직사 11평,협문 2동,주차장 11면으로 완전한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니 훼철된지 132년이요,복원추진회가 결성된지 15년 만이라 복향 봉안문은 오천 정동열씨가 찬하니,복원을 위해 참여한 인사는 물론 향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의 기쁨 또한 같을 것이다.
아울러 시비로서 사업을 완수한 박맹우 울산광역시장과 시의회 김철욱 의장 시의원,조용수 중구청장 및 구의회 의원께 감사 드립니다.
상기에서 설명되었지만 구강서원은 개인적으로 나의 직계 11대 동영조께서 송정박씨 입향조 창우공(괴천공)과 함께 설립에 발의를 하였고 설립되기전 조졸하시어 그의 아들 시찬, 시강조께서 출자를 하신 울산 사학의 요람이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근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 친구들은 이런 서원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아울러 바로 옆에 있는 충의사를 반드시 함 들려 우리 선조들의 피, 눈물로 우리 울산지켜온 모습을 그려 보며 선령들의 위패앞에 추모를 했으면 합니다.
다음은 충의사 소개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