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큰 스승 법정스님의 어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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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작년에 이어 올해 또 한 분의 큰
스승이신 법정스님께서 성북동 길상사 에서 입적하셨다.
법정(法頂)스님(속명 박재철) 세수 78세, 법랍 54세.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군에서 태어나 전남대 상대 3년을 수료한 뒤 24세 때인 1956년 경남 통영시 미래사에서 효봉(曉峰) 스님을 만나 출가했으며 1959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5대 총림의 하나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 조계총림의 문을 연 구산 스님, 송광사 회주인 법흥 스님, 환속한 시인 고은 씨 등과 사형사제 간이다.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남 하동군 쌍계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 수련원장 등 종단 소임을 몇 차례 맞았을 뿐이며, 수행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1994~2003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회주와 1996~2003년 서울 성북구 길상사 회주를 지냈다.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는 17년간은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으며 불일암 시절 초반인 1976년 4월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따라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은 1992년부터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잘하지 않았지만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들려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진리의 말씀(法句經)', '불타 석가모니', '숫타니파타', 因緣이야기', '신역 화엄경',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스승을 찾아서' 등이 있다.
특히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말은 스님이 설파하던 '무소유'의 정신을 압축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로 시작하는 창건 법문도 이러한 무소유 정신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
그런가 하면 말년인 지난 2008년 낸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마지막 모습까지 귀감이 되기도 했다.
故 법정스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
법정스님의 주요 어록.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아름다운 마무리' 중)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무소유' 중)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산방한담' 중)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중)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아름다운 마무리' 중)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있으면 합니다.
(1997년12월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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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입적--하안거 해제법회 (서울=연합뉴스) 불교계 원로 법정스님이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2007년 8월 27일 길상사에서 열린 하안거 해제법회에서 법정스님이 법문을 설파하는 모습. 20103.11 << 연합뉴스 DB >> photo@yna.co.kr |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은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법문을 통해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특히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말은 스님이 설파하던 '무소유'의 정신을 압축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로 시작하는 창건 법문도 이러한 무소유 정신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
그런가 하면 말년인 지난 2008년 낸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마지막 모습까지 귀감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법정스님의 주요 어록.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산방한담' 중)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법정스님 입적--합장하는 법정스님 (서울=연합뉴스) 불교계의 원로 법정스님이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2009년 4월 19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열린 봄철 정기 대중법회에서 합장하는 모습. 2010.3.11 << 연합뉴스 DB >> photo@yna.co.kr |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버리고 떠나기' 중)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홀로 사는 즐거움' 중)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있으면 합니다.(1997년12월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아름다운 마무리' 중)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아름다운 마무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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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하는 법정스님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법정 스님이 19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열린 봄철 정기 대중법회에서 법문을 하고 있다. 2009.4.19 seephoto@yna.co.kr |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
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중)
▲풍요는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와 올바른 정신을 준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됐으면 한다.(1997년 12월 길상사 창건 법문)
▲9ㆍ11테러는 업(業)의 파장이다. 할리우드 영화 등 난무하는 폭력물에서 테러 집단이 배운 것이다. 지금까지의 업이 지금의 나를, 오늘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다.(2001년 11월 뉴욕 불광사 초청 법회)
▲경제 논리, 개발 논리로 자연이 말할 수 없이 파괴돼 간다. 대지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곧 자기에게 상처 입히는 일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모체가 앓고 있는데, 그 지체가 어찌 성하겠나.(2003년 10월 대구 초청 강연)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신다'는 말을 기억하라. 용서는 저쪽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굳게 닫힌 이쪽 마음의 문도 활짝 열게 한다.(2004년 4월 길상사 봄 정기법회)
▲세상을 하직할 때 무엇이 남겠나. 집, 재산, 자동차, 명예, 다 헛것이다. 한때 걸쳤던 옷에 지나지 않는다. 이웃과의 나눔, 알게 모르게 쌓은 음덕, 이것만이 내 생애의 잔고로 남는다.(2006년 부처님오신날 법회)
▲행복의 비결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아는 데 있다. 자기 그릇을 넘치는 욕망은 자기 것이 아니다. 넘친다는 것은 남의 몫을 내가 가로채고 있다는 뜻이다.(2008년 8월 길상사 하안거 해제 법회)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각자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며 가꾸어 온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치길 바란다.(2009년 4월 길상사에서 가진 마지막 법회)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은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2008년 산문집 < 아름다운 마무리 > 에서)
미리쓰는 유서 / 법정스님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 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이제 법정스님의 말도 글도 담지 말고,
책도 소유하지 말것이요,
기억조차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향기처럼 살다 가신 그분의 향기를 쫒을 뿐...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화상의 ; 청산은 나를보고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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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