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고 '1만원 장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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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4월 15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에 게재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만물상] 제물포고 '1만원 장학금'
1960년대 인천중·제물포고 신입생들은 문학·교양 도서를 한 권씩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 학교 도서관은 책이 많기로 유명했다. 누구나 서가에 들어가 책을 빼 보는 개가식(開架式)도 자랑거리였다. '1인 1권' 기증운동의 바탕엔 그런 자부심과 후배 사랑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풍요로운 도서관을 마음껏 누리는 데 보답하고,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에게 더욱 좋은 도서관을 물려주자는 생각이었다.
▶1950년대 석두(石頭·돌머리)라 불렸던 이 학교 길영희 교장은 시험감독을 없애버렸다. "제자들을 못 믿고 눈에 쌍심지 켜고 감시하는 선생이나, 선생 몰래 슬금슬금 훔쳐서 점수를 올리는 학생이나 무엇에 쓰겠는가." 학년 말에 낙제생이 열 명 넘게 나오자 교장이 모두 교장실로 불렀다. "부정의 유혹 대신 낙제를 택한 너희들은 우리 학교의 양심이다." 교장도 학생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낙제생들에겐 1년 장학금이 돌아갔다.
▶모금액 21억원, 한 해 장학금 1억5000만원, 지금까지 장학생 1000여명. 인중·제고 장학회가 지난 7년 거둔 성적표다. 장학회엔 1000명 넘는 동문이 참여하고 있다. 매달 기금 1만원씩을 자동이체로 받는 '만원만' 운동 덕분이다. '개미' 기부자들을 보며 '코끼리' 기부자도 줄을 이었다. 3대가 100년 동안 해마다 1000만원씩 기부하겠다고 약정을 맺은 동문도 있다.
▶4월부터는 '기부 보험'이 시작됐다. 동문이 생명보험에 들어 보험료를 내다 사고가 나면 장학회가 보상비를 받게 하는 방식이다. 인중·제고 장학회는 졸업생에게도 장학금을 준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분야 동문들을 격려하자는 뜻에서 동문 10명 이상 추천을 받아 500만~1000만원씩 연구비를 건넨다. 그동안 건축가·역사학자·환경운동가·생태학자 4명이 혜택을 받았다.
▶1만원은 작기도, 크기도 한 돈이다. 1만원짜리 5대 고궁 통합입장권을 사면 경복궁·덕수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다 볼 수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전국 15개 우수 연극을 한자리에 모은 '대학로 희망연극 프로젝트'의 한 편 입장권이 1만원이다. 인중·제고 장학회 '만원만' 운동은 '만원의 행복', 그 참맛을 보여준다. 동창회가 기부 문화를 퍼 나르는 샘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