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외교인물 충숙공 이예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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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스크랩입니다, 함 읽어주시고
또한 오는 10/23일(토) 20시 특집으로 역사스페설에
이예선생의 재조명이 이루어집이다 꼭 봐주시길 당부드리며
이는 한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600년전 울산에 이런 분이
계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아울러 세종로 세종대왕 동상 지하 세종기념관에는
세종대왕 시대의 외교편에 이예선생의 활동사항을
별도 기념하여 전시가 됩니다..
포로 667명 송환… 조선 최고 대일 외교관
“위험지역 마다않고 찾아
자국인 보호위해 맹활약
오늘날 외교관들의 표상”
외교통상부가 조선 초기의 통신사 충숙공 이예(忠肅公 李藝·1373∼1445·초상화)를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
외교부가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을 올해 선정한 것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킨 고려의 외교가 서희(徐熙·942∼998)를 지난해 첫 대상자로 선정한 데 이어 두 번째다.
외교 소식통은 20일 “외교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인터넷 투표 결과 등을 놓고 16일 회의를 열어 이예를 두 번째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며 “올해 그를 재조명하는 각종 연구 활동과 심포지엄 등을 통해 오늘날 한국을 이끌어 갈 외교인의 상(像)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예는 중인(아전) 출신으로 일본과의 교섭에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동지중추원사라는 종2품 벼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아들 이종실도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풍랑으로 순직했다.
어릴 적에 모친이 왜구의 포로로 끌려간 뒤 불우한 시절을 보낸 이예는 일선 행정 실무를 맡던 하급 관리인 울산의 향리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396년(태조 5년) 울산군수 이은 등 관리들이 왜구에게 인질로 잡혀가자 왜구의 배를 쫓아가 군수와 함께 탈출 계획을 짜기도 했다. 때마침 조정에서 통신사를 보내 왜구들과 화해하자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왔고 이때의 노력을 인정받아 아전 신분을 벗어나 본격적인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이예는 1400년 대마도 부근의 일기도를 방문해 왜구의 침범을 막는 약속을 얻어냈다. 이때부터 대일 교섭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거나 대마도 등에 사절로 가 조선인 포로 667명의 송환을 성사시켰다.
그는 오늘날의 비자 격인 ‘문인(文引)’제도를 확립하기도 했다. 태종의 왜구 정벌 이후 왜구의 침략은 줄었지만 일본인 왕래가 늘어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급권을 인정함으로써 수를 제한했다. 이 제도는 강력한 왜인통제책으로 활용됐고 이를 규정하는 계해조약(1443)이 체결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 조정이 일본 국왕과 대마도 등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모두 65차례였다. 이예는 43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통해 40여 차례에 걸쳐 일본에 갔고 이 중 7회는 정사 혹은 부사 자격이었다. 당시 일본 3회 파견자가 2명, 2회 파견자가 1명, 1회 파견자가 25명인 것과 비교하면 그가 조선 초기 대일외교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가 잘 드러난다. 그는 통신사 활동을 통해 대장경 및 불경을 일본에 전파하고 일본에서 재배되던 사탕수수를 국내에 보급하기도 했다.
외교 소식통은 “전문 외교관으로 험지를 마다 않고 찾아가 자국인을 보호한 이예의 활동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험지에서 활동하는 지금의 우리 외교관들이 본받을 표상”이라고 말했다. 이예는 2005년 2월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만물상] '외교관' 이예(李藝)
?신효섭 논설위원 bomnal@chosun.com
입력 : 2010.06.21 23:27
1438년 어느날 세종대왕이 중신들을 불렀다. 임금은 "대마도 왜인(倭人)들이 교역을 빌미삼아 너무 많이 몰려든다"며 이들의 체류를 제한할 방법을 물었다. 세종실록은 "중신들이 '(일본에) 사행(使行·사신 방문) 간 이예(李藝·1373~1445)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적고 있다.
▶이예는 태종·세종 1401~43년 40차례 넘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이무렵 그만큼 자주 일본에 다녀온 조선 관리는 없었다. 1426년 세종이 54세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을 만큼 독보적 대일(對日) 외교통이었다.
▶이예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계급 아전이었다. 1396년 울산에 일본 해적들이 쳐들어와 군수를 사로잡아 갔다. 이예는 해적선에 숨어들어 "군수를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적들에게 간청했고 결국 두 사람 다 풀려났다. 조정은 이예의 충성심을 높이 사 벼슬을 주고 사대부 양반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종2품 동지중추원사까지 올랐고 이런 인연으로 학성(鶴城·지금의 울산) 이씨 시조로 받들어진다.
▶왕조실록이 전하는 이예의 공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40여년 동안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협상을 통해 구출한 점이다. 8세 때 어머니를 왜구에게 납치당한 그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71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수행한 임무도 대마도에 붙잡혀 간 포로 귀환협상이었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대마도)에 출입한 신(臣)이 가는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해 포로 7명을 데려왔다.
▶어제 외교부가 올해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선정했다. "대마도 같은 험지에서 국익 증진과 국민 보호에 헌신했다"는 점에서다. 그는 2005년 문화부 '이달의 문화인물'로도 뽑혔다. 일본에 여러 불경을 전하고 일본에서는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를 들여온 공을 기렸다. 협상으로 포로를 구해내는 외교력, 노구(老軀)에도 적진에 몸을 던지는 용기, 600년 전에 문화·기술 같은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혜안….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외교관이 바로 이예 같은 인물이 아닐까.
왜구에 끌려간 포로 6백 67명 구한 조선외교관
SBS | 김지성 | 입력 2010.08.16 21:12
< 앵커 >
왜구에게 끌려간 조선인 수백명을 외교력을 발휘해 돌아오게 한 관리가 있습니다. 외교부가 올해의 외교인물로 뽑은 '이예' 선생인데요.
일본에 남아있는 이예의 발자취를 김지성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일본 쓰시마의 이즈하라항에서 축제가 한창입니다.
조선시대 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입니다.
조선시대 외교사절 가운데 이곳 일본을 가장 많이 다녀갔던 사람이 바로 이예입니다.
이예는 조선 초기 무려 40여 차례나 이곳에 파견됐습니다.
이예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던 것은 태조 때인 1396년, 자신이 모신 군수가 왜구에게 붙잡혀가자 포로를 자청해 쓰시마까지 따라가 군수를 데리고 귀환했습니다
중인 계급이었던 이예는 이 일을 계기로 관직에 올라 본격적인 대일 외교에 나섭니다.
세종 때는 왜인에게 삼포를 개항해 무역을 허락하는 내용의 계해조약 체결을 주도했습니다.
조선시대 한일관계의 근간이 됐던 조약입니다
44년 동안 일본을 오가면서 왜구에게 붙잡혀간 조선 포로 667명을 귀환시켰습니다.
[나가도메 히사에/일본 향토사학자 : (계해조약으로) 세상이 안정됐습니다. 긴 역사 속에서 두 나라 관계가 제일 안정됐던 시대가 15세기에서 16세기입니다.]
이예의 외교 철학은 '대의명분으로 타이르고 실리로 달래 왜인들을 따르게 한다'는 것 었습니다.
600년 전 나라를 위해 먼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예, 근대 이전의 우리 외교사에서 대일 외교를 주도했던 전문외교관의 귀감입니다.
(영상취재 : 임우식)
김지성 jisung@sbs.co.kr